정소연 (사회복지학과·01)

어린 시절, 충무공을 기리는 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습니다. 한산도까지 군함을 타고 가서 치른 백일장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검푸른 바다를 보았습니다. 화물선이 드나드는 항구의 회적색이나 해수욕장의 탁한 녹황색과는 전혀 다른,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청색이었습니다. 지금은 행사명도, 가서 제가 쓴 글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낮의 햇볕에 뜨겁게 달아오른 커다란 배 위에 서서 내려다보았던 바다와, 장군이 아니라 바다에 대해 쓰고 싶었던 마음만은 아직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 푸른색을 글에 담고 싶었습니다. 삶에 담고 싶었습니다. 갖고 싶었습니다. 눈길을 주면 읽을 수 있고, 손을 대면 만져볼 수 있는 형체를 부여해 꽉 움켜쥐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학문학상에 응모했습니다. 대학문학상의 심사평에 실렸던 문청(文靑)이라는 말에 욕심이 났습니다. 어쩐지 누가 저를 문청이라고 불러주기만 하면, 부족한 문재(文才)로는 표현하지 못했던 그 푸른색을 가슴에 담고 살 자격을 얻을 것만 같았습니다.

허나 막상 전화를 받고 나니, 푸른 너울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밀려왔습니다. 원고지 다섯 매 분량 소감을 쓴답시고 몇 시간이나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워 창문을 열고 때맞춰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서울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고, 십이 월 하늘에는 푸른색의 파편도 없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던 주먹을 펴고, 인정하기 어려운 많은 부족함과 떨치기 어려운 부끄러움과 그럼에도 손끝을 스쳐 지나가는 기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썼습니다. 이곳에는 물꽃이 피어오르는 림보도, 환상을 연구하는 해양학과도 없습니다. 그러나 시멘트벽만은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의 경계 어디쯤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벽 어딘가에는 안/밖으로 열리는 문 또한 있으리라고, 감히 믿습니다.


부족한 글을 너그럽게 보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사랑하는 부모님과 늘 힘이 되어주는 동생 미연, 격려해 주신 학내·외 지인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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