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양

0. 들어가며

온갖 잡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내개봉이 이뤄진 김기덕 감독의 「시간」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사뭇 흥미로운 것이다. 교과서적 해석은 나올 수조차 없고, 이 영화를 칭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러한 상황이 초래된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국내의 대개의 평론가들이 김기덕 감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세우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 둘째는 영화 「시간」 자체가 많은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 평론가들이 달려들 만한 함의가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거칠고 조악한 부분이 눈에 띈다는 점이다. 그런데 전작 영화들에서도 서툴고 어딘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자주 지적되어왔고, 감독 스스로도 이러한 부족함을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이라 표명해왔다는 점에서 보면1) 결국 영화 「시간」이 다른 누구도 아닌 김기덕 감독의 영화이기 때문에 논쟁이 불거진 것이다. 그들은 김기덕이라는 괴기스러운 안개를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작품보다는 오히려 감독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시간」에 대한 여러 평론들에서 장르규정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미 「시간」은 어떤 테두리에 속하기 이전에 단지 김기덕의 영화라는 것이고, 그걸로 이야기는 끝났다는 태도이다. 여기서는 먼저 그러한 태도를 극복하려고 한다. 이는 「시간」을 어떤 특정 장르로 분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김기덕에 앞서 영화 「시간」의 성격을 추출해보겠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영화 「시간」을 김기덕의 세계 안에 위치 지을 수 있을 것이다.

1. 「시간」의 인물 - 괴물 영화의 성격에서 바라보기

이 영화의 주인공 새희, 얼굴 예쁜 그녀를 두고 괴물이라고 몰아붙인다면 동의하고자 하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고전적 괴물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을 닮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괴물, 즉 괴물의 변종인 것이다. 먼저 성형수술을 한 뒤 커다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등장하는 그녀의 모습은 평범하지 않다. 새까맣고 긴 털이 얼굴 주변을 훌훌 날리는 의상은 부피 면에서 봐도 그녀를 실제보다 더 크게 부풀리고 있으며 전체적인 스타일에서 풍기는 느낌은 한마디로 섬뜩함이다. 그녀가 배 안에서 지우와 축구공을 주고받는 동안 온 화면에 황량한 긴장감이 내려앉는 것도 바로 그녀의 기괴한 스타일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스타일은 괴이한 거부감을 준다. 그녀의 성형수술이 성공하여 마스크를 벗으면 미모의 여성이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부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생명체에 대한 거부감, 인공적 아름다움에 부닥칠 때의 소름 돋음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이 영화에서 성형외과 의사는 현대판 괴물 창조자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을 탄생시키는 빅토 박사, 「가위손」에서 인조인간 에드워드를 만드는 과학자처럼 그도 영화적으로 허용된 전지전능함을 누린다. 그의 성형을 통해 세희는 전혀 새로운 인물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앞의 두 영화에 등장하는 인조인간들은 필연적으로 배척되고 축출되듯이 「시간」의 새희가 버림받는 것도 그녀의 탄생 순간 예정된 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괴물은 거의 언제나 정체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은 ‘난 누구지?’ 혹은 ‘넌 누구냐?’라는 혹독한 질문에 당도한다. 새희 역시 그녀에게 절대적 존재인 지우로부터 끔찍한 절규를 듣고 만다. “(넌) 누구야?” 이러한 문제는 괴물 영화의 오래된 주제의식, 즉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되는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고전적 괴물 영화가 다루는 큰 테마는 자아의 분열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은 곧 빅토 자신이며, 「지킬박사와 하이드」에서 지킬박사는 곧 하이드이다. 자명하게도 새희는 곧 세희이지만 현재의 그녀(새희)는 자신 내면에서가 아니라 지우의 기억에서 과거의 자신(세희)을 발견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새희는 세희 때문에 고통받으며 세희를 질투하고 세희를 역겨워한다. 그녀는 지우에게 ‘사랑해요’라고 적은 쪽지 밑에 쓴 이름 ‘세희’ 위에 ‘새희’라는 글자를 덧쓴다. 이때 그녀의 행위가 띠는 뉘앙스는 무자비함이다. 그녀는 굵은 펜으로 고이 적힌 ‘세희’를 뭉갠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영화에서 두 번 반복되고 있다. 또한 그녀는 과거의 기록인 사진에서도 세희를 새희로 대체시키려 한다. 손모양의 조형물에서 지우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과거의 사진을 치운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그녀가 골몰하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과거라는 시간 속에 묻어버리고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지우로부터 이별 통고를 받은 후 새희의 의식은 급기야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부정의 반복 속에서 또 동시에 과거의 세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세희의 사진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다시 성형수술 직후에 보았던 괴물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다. 괴수성을 상징하듯 긴 털이 목을 휘감은 의상을 다시 꺼내 입은 그녀는 과거의 가면을 쓴 채, “난 과거의 그 여자 아니야. 가면을 벗기고 지금의 날 봐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발언과 그녀의 내심은 괴리되어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의상은 세희와 새희 사이의 과도기에 입었던 의상이다. 그 의상을 입음으로써 그녀는 다시 세희로 돌아가고자 함을 표현하고 있다. 세희의 사진으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 또한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다른 뭔가가 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 불안한 경계선에 다시 올라선 그녀는 두 번째 버림받고, 그녀는 성형 외과 의사 앞에 나타나 과거의 사진을 무참히 찢는다. 고전적 괴물 영화와 달리 새희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것이고, 따라서 괴물 영화에 나타나는 창조자에 대한 복수는 이러한 일시적 분개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성형외과 의사는 다른 사람의 수술을 집도 중에 있는데, 수술 방해 행위 자체가 의사의 수술에 대해 간접적으로 조롱하고 분개하는 것이며, 화면의 배경으로 보이는 수술 장면은 그러한 분개의 긴장도를 높이고 있다.

2. 「시간」의 이야기 구조 - 비극과 희극의 경계, 도덕성과 비도덕성의 경계

상술한 장면까지가 고전적 괴물 영화라는 틀을 통해 설명되는 부분이다. 이제 지우도 성형수술을 하게 되면서 영화는 예상치 못한 변주를 향해 치닫는다. 또한 마지막에 가서 새희는 두 번째 성형수술을 받는다. 괴물영화의 변종이 탄생하는 곳은 새희가 괴물이라 하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점이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이다. 바로 전염과 반복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김기덕의 폭력적 구조가 시작된다. 한 번 만든 괴물의 파멸을 목도하고도 또다시 괴물을 만드는 것, 한 번 때린 곳을 또 때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공포의 극단이자 폭력의 끝 간 데가 아니겠는가. 김기덕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 영화를 보면 갈 데까지 가잖아요. 그 다음은 갔던 데까지 갔던 그 끝이 도로 시작점이 아닐까, 그런 순환구조를 생각하죠.”2) 만약 지우가 새희를 버리고 떠나는 데서 영화가 끝난다면 여기서 고전적 괴물 영화의 구도는 완성된다. 괴물이라는 존재의 본체는 사랑의 결핍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기덕 감독은 지우의 성형수술 장면을 찍은 사진을 들고 나타난다. 처음 시도 자체가 과오로 판명났다면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과오로부터 오는 비극이 일단락된다. 비극 위의 비극, 따라서 희극이면서 비극이 되는 구조는 무엇일까. 바로 그 과오를 또 다시 범하는 구조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의 영화의 비도덕성이 드러난다. 전형적 이야기의 구조에서 치명적 과오는 한 번으로 족하다. 그 한 번의 과오로부터 주제의식이 충분히 도출되기 때문이다. 도덕적 주제의식을 내포하는 이야기에서 과오는 성찰로, 성찰은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이야기 안에 설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노파를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적 메시지는 이야기 안에서 하나의 구조를 갖고 구현된다. 「미녀와 야수」에서 왕자는 한 노파를 홀대했다가 저주에 걸려 야수가 되는데 이러한 이야기 구조 안에 이미 교훈적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김기덕의 이야기 구조가 전형적 이야기 구조와 대립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미녀와의 사랑을 통해 다시 왕자로 돌아온 그가 또 노파를 홀대해서 야수가 되는 것이다. 혹은 이번엔 미녀가 노파를 홀대해서 야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론 부족하다. 이러한 두세 번은 극단이 아니다. 무한 반복이야말로 무(無)의 반대편에 있는 극단의 다른 이름이다. 두 번째로 노파를 홀대하는 그 장면이 사실 이야기의 처음이라고 하자. 이제 그는 계속해서 야수 되기를 반복한다. 이미 이 이야기는 비극도 희극도 아닌 것이며 도덕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과실의 반복이 희극인 바보 이야기의 모티브로 자주 사용되는 것에서 보듯이, 비극의 무한 반복은 비극의 극한이자 희극의 출발이다. 과오의 반복은 도덕적 교훈이 아닌, 도덕적 교훈에 대한 조롱의 다른 형식일 것이다. 지우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는 「시간」을 코미디라고 장르규정하고 있는데3), 그의 말에 수긍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평면적 내러티브가 아닌 이러한 이야기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성형 수술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새희가 버림받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성형수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형성시킨다. 무서운 거구나, 돌이킬 수 없는 거구나, 저 혼란이란…. 그러나 「시간」에서 관객이 자신의 반응을 굳히기도 전에 주인공은 또 다시 성형수술을 하며, 그것의 무한 반복을 암시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도덕을 지키는 사람과 그것을 파괴하는 사람이 있다면 김기덕 감독은 스스럼없이 도덕을 파괴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4) 여기서 ‘도덕’이란 결국 하나의 응고된 메시지의 하위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단지 하나의 메시지, ‘…해야 한다’라는 말 던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교훈에 대한 조롱, 곧 메시지에 대한 조롱을 통해 그의 영화는 도덕적이거나 혹은 비도덕적이기를 거부하고 그 경계에서 탈(脫)도덕적이 되기를 꿈꾼다.5)

3. 「시간」의 정서 - 공포감의 모자이크

그러나 주연 배우가 이 영화를 ‘코미디’라고 정의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반응은 코미디를 볼 때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의 몇몇 장면6)에서 웃음을 유발하긴 하지만, 결코 그것이 영화 전체의 정서를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 웃음은 오히려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배치되는 엉뚱함에서 유발되는 웃음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체에 드리워진 정서는 공포감이며, 이 공포감을 주재료로 한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 이 영화가 주는 기괴한 감정의 굴곡을 형성하는 것이다. 대개의 공포 영화에서는 공포감과 안도감의 교차가 정서를 형성하고, 관객은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가운데 공포의 미학과 공포감의 극복을 통한 쾌감을 찾는다. 「시간」은 공포감의 반대편에 안도감을 두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안도할 수 있는 장면은 없으며, 감독은 그 빈자리에 웃음 혹은 냉소를 가져다 놓는다. 그것은 불안한 줄타기이며 공포감은 정체를 감춘 채, 끊임없이 확장되고 전이된다. 여기서는 이 영화에 잠복하고 있는 세 가지 공포의 정체를 밝힘과 동시에 그러한 공포의 미학에 주의하고자 한다. 여기서 조명하는 세 가지 공포는 각기 개별적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영화 전체의 정서를 음울하고 기괴한 것으로 모자이크해 나간다.

첫 번째 공포는 구체적·물질적인 것으로 성형수술의 공포이다. 만약 성형수술이 고통이나 거부감 없이 이뤄지는 거라면 영화 전체에 드리우고 있는 기괴한 공포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형수술 장면을 클로즈업해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는 영화의 첫 장면부터가 감독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김기덕 감독은 관객에게 성형수술에서 유발되는 감정으로서 공포감을 주입한다. 결국 성형수술 준비 장면은 두 번, 성형수술 장면은 네 번 등장하는데, 이 네 장면 중 영화 전개상 반드시 필요한 장면은 하나뿐이다. 다른 세 장면들은 영화의 장식적 요소에 속할 것이며, 정작 영화 전개 상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여자 주인공의 두 번의 수술 장면은 성형수술 준비 과정을 보여준 뒤 수술실의 불빛이 하얗게 밝혀지는 것을 카메라에 담는 관습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필요할 때는 간접적으로, 필요 없는 부분에서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성형수술 장면을 다루고 있는데, 이는 관객을 괴롭히기 위한 김기덕 감독의 심보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오해7)를 산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줄거리를 진행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위기를 구축하기 위해 필수적인 장면들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가치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다. 세희와 새희, 지우와 지우가 아닌 타자, 익숙함과 새로움, 영원한 사랑과 세속적 만남, 그리움과 망각, 직선적 시간구조와 순환적 시간구조 등 양립할 수 없는 두 측면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대립하는 것들에 앞서 영화는 하나의 욕망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성형외과 출입문에 적혀있는 문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을 원하십니까?’ 이는 감독이 관객에게 첫 번째로 제시하는 물음이며, 영화를 이끌어 가는 욕망의 원천이다. 영화 전체에 새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등장인물의 삶의 방식, 의상, 배경이 되는 공간 등 모든 것이 김기덕적 세계에서 막 이사 나온 것처럼 새롭다.8) 그런데 모든 욕망에는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며,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는 욕망과 그 대가, 이 둘 또한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결국 외면적으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욕망의 반대편에 있는 대가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성형수술인 것이다. 성형수술 장면이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새롭고자 하는 욕망은 더욱 강렬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대가가 혹독할수록 욕망은 강렬해지는 세계, 그것이 김기덕 감독이 쌓아온 세계이다. 끔찍한 성형수술 장면을 보여주면서 성형수술을 재고해 볼 것을 권하는 의사에게 세희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워질 수 있다면, 참아야죠.” 이 말은 욕망이 있으면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김기덕 감독의 사고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말하듯, “갈 데까지 가는” 주인공들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관객들은 그 주인공들의 욕망을 따라가기 위해서 그 주인공들을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세희의 욕망에 관객들을 직접적으로 동참시키기 위해서 성형수술 장면은 더 극렬한 공포를 주어야만 한다.

영화 「시간」이 장치해 놓고 있는 두 번째 공포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서 돌이킬 수 없음에 따르는 공포이다. 돌이킬 수 없음은 본래 비가역적인 시간 안에서 살고 있는 인간 모두가 안고 가야만 하는 숙명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러한 숙명이 현실보다 더 강력한 족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대로 돌이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어떠한 변신도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신나는 모험이 된다. 그러나 「시간」에서의 변신은 비가역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이미 비극적 공포를 내포하고 있다. 성형수술을 결심한 세희에게 의사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영화의 규칙이 확고하게 성립된 것이다. 영화에서 성형외과 의사는 사람의 얼굴을 “아비도 못 알아보게” 바꿔버릴 수 있지만, 절대 원래 모습으로는 바꿀 수 없다. 이는 극단까지 가고 있는 영화적 상상력을 감독 스스로 제한해 놓은 하나의 철조망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어떤 구역 안에 존재하는 인물은 언제나 그 구역 밖을 갈망하고 그러한 갈망으로 인해 소진되고 상처받는다. 이제 이러한 상상의 구역을 설정해놓은 김기덕 감독에게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철조망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는 일이 남았다. 불가능한 것을 향한 갈망으로 주인공의 심리는 피폐해지고 그 절정에서 관객이 만나는 감정은 안타까움과 엇섞인 공포이다. 새희는 세희의 사진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지우 앞에 나타난다. 가면 쓴 새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우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관객은 경악하게 된다. 안타까움과 섞인 공포, 그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타까우며, 동시에 그녀가 돌이키고 싶어할까봐 두려워지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단순한 안타까움은 알코올처럼 증발해 버리리라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그는 비애감에 공포를 섞어 관객의 감정에 잊혀지지 않을 낙인을 찍는다. 공포라는 감정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이키고 싶다는 갈망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영화는 반복해서 회귀의 욕구를 건드린다. 가면을 쓰고 나타난 새희에게 의사는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으세요?”라고 묻는다. 돌아갈 수 없음을 경고한 바로 그 의사의 물음이기에 이는 잔인한 고문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던 새희도 지우라고 생각한 남자의 죽음을 목격한 후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는다. 기어이 감독은 자신이 쳐놓은 철조망에 주인공을 팽개친다. 새희는 드디어 피투성이가 된 채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이 돌이키고 싶어 하리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이 영화에서 공포감이라는 정서를 구성한다.

영화 「시간」에 내재하고 있는 세 번째 공포는 등장인물로부터 관객에게로 전이되는 공포로서 단절에 대한 공포이다. 세희와 지우 모두 관계의 단절을 두려워한다. 세희는 지우에게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할까 봐 성형수술을 한다. 지우는 세희가 사라진 후 다른 여자들과 내키지 않는 만남을 거듭하는데 이는 세희 없이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서다. 성형수술을 하고 나타난 새희가 결국 세희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지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다 결국 자신도 성형수술을 하는데, 어찌 보면 이해하기 힘든 이러한 행동 역시 새희(혹은 세희)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 마지막으로 새희는 새로운 얼굴로 나타날 지우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지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것이다. 결국 인물의 행위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으며,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사건의 시작이 하나의 두려움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우는 새희에게 왜 그런 거냐고 묻는데, 새희는 자신의 비정상적 시도의 출발을 한 마디로 정리하고 있다. “시간이 무서웠어.” 그녀는 새로워지고 싶었다거나 널 너무 사랑해서 라고 표현하지 않고 ‘무서웠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녀 행위의 정체가 ‘공포’에 귀결되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시간 자체가 아니라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당도할 어떤 자리가 무서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공포의 대상은 시간에 따른 사태의 변화 또는 그녀가 가치를 두는 것의 상실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지우와의 관계의 단절이다. 이 하나의 공포감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4. 「시간」이 제기하는 물음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가 묻는 물음은 실존의 본질과 시간의 구조에 관한 것이다. 먼저 영화에서는 실존의 본질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새희는 원래 세희였지만 이제는 세희를 질투하고 부정한다. 그런데 새희는 다시 성형수술을 함으로써 다시 부정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된다면 세희(혹은 새희)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잠재적 대상의 본질적 특성은 잃어버린 대상이라는 데 있다. 현실적 대상의 본질적 특성은 변장한 대상이라는 데 있다.9) 여기서 잠재적 대상에 세희를, 현실적 대상에 새희를 대입할 수 있다. 그런데 다시 현실적 대상(새희)이 잠재적 대상이 된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무수한 차이가 생성되며 결국 본질은 파편이 되어 증발해 버리는데, 여기서 실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다음으로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가지의 시간구조가 충돌한다. 하나는 비가역적이고 직선적인 시간구조인 반면, 다른 하나는 순환적이고 원환적인 시간구조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성형수술을 하고 나오는 새희와 과거의 세희가 부딪히는데 여기서 둘은 현실적으로는 만날 수 없는 존재이다. 새희로부터 계속 진행되는 미래가 현실이라고 하려면, 부딪힌 세희는 가짜거나 혹은 세희가 아닌 비슷한 다른 인물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속 편하게 유사한 인물이라고 얼버무리려 한다면 영화 초반에서 세희가 미래의 자신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세희가 진짜라고 한다면 새희로부터 시작하는 미래는 다시 세희로 돌아가는 원환적인 시간구조로부터 튕겨 나와 더 이상 구성될 수 없는 환상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보면 다시 두 가지 결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영화가 처음으로 돌아가 전 과정이 반복되는 영원회귀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결론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비극들이 단지 세희의 판타지였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 즉 영화 전체가 현실이냐 판타지냐 라는 물음을 일단 제외하고 궁극적인 물음으로 돌아가면 ‘새희가 현실이냐, 세희가 현실이냐?’ 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그런데 본디 세희가 성형수술을 함으로써 새희가 되었기 때문에 둘은 동일 인물이고 이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물음으로서 제기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문제의 이면에는 영원회귀본능과 죽음본능이라는 한 인간 안에 있는 대립되는 두 본능의 충돌이 있는 것이다.

결국 영화 전체를 하나의 틀로 설명해내기 위해서는 마지막 장면의 순간적 의문을 철학적인 물음으로 확장시키지 않을 수 없는데,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물음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제기된다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본 뒤에 물음만 남고 해답은 없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를 다시 본다고 해도 영화 안에는 해답이 없음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이제 관객은 「시간」이 만들어 놓은 물음표의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영화를 다 본 후에 밀려드는 심상치 않은 의구심,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의 미결정 상태라는 떨떠름함은 이 함정 안의 공기의 질감이다.


5. 김기덕의 세계 안에서 「시간」의 위치 - 공포로의 돌진에서 공포로부터의 도피로

「시간」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치고는 대사가 많은 편인데, 김기덕 감독이 대사보다는 영상을 통해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해왔으며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어왔던 것을 돌이켜볼 때 이번 영화에서 감독이 익숙한 방식을 버리면서까지 대사를 통한 메시지 전달에 공을 들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많은 대사들 가운데서도, 지우와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 새희의 독백은 유독 어색한 동시에 의미심장하다. 여기서의 독백은 마치 여러 가지 면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움을 선보인 감독 자신이 관객을 향해 불쑥 말을 거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원하던 대로 되었습니다. 제가 행복해보이나요? 그런데 이상하게 슬프네요.” 여기에서 새희의 입을 통해 김기덕 감독이 강조하고 있는 단어는 다름 아닌 ‘행복’이며, 결론은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의 영화들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김기덕 감독이 여러 차례 ‘행복’에 관한 자신의 관점을 밝혀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 영화의 구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다. 내가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것은 심리적인 해방감이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걸 인정하고 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10) 또한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영화관을 행복과 연관시켜 언급한 바 있다.11) 그는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현실 안에 행복이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고, 다만 추상적인 행복감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현실을 구성하는 공포를 정면으로 돌파할 용기를 가질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가 써온 방식은 현실 안에 있는 공포를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의 상처를 안고 있는 등장인물의 상처를 후벼 파는 식이고, 한 사람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연쇄해 나간다. 지나치게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이 꼭 필요하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끝까지 처절하게 가는 걸 표현하고자 한다. 극단을 표현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12) 즉, 지금까지 그의 방식은 현실의 공포가 있다면 그것을 직시하고 그 공포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것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담은 영화들은 왜 그러한 공포가 존재해야만 하는지 그것 안에서 발견되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처절한 물음들이었다.

이제 「시간」에서 그는 방향전환을 시도한다. 그는 지금껏 공포의 실체를 피하지 않고 그 안에 뛰어들었고, 이를 통해 ‘심리적으로 행복해지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야만, 아름다움이 추함으로부터 구출되고 선이 악 위에 승리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래야만 영화가 볼 만한 것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평론가들은 그의 이미지 미학은 동의하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그는 이번에 반대 방향으로 뛰어든다. 공포 자체를 무화시키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공포, 누구나 겪지 않을 수 없는 공포, 바로 ‘나는 영원히 나’라는 공포이다. 어찌 보면 공포랄 것도 없이 당연하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면 말할 수 없이 참혹한 형벌, 나는 나이어야만 한다는 굴레, 그것을 한번 벗어나 보겠다는 것이다. 그는 “김기덕적 사고라는 건 그럴 수 없는 걸 그럴 수 있는 상황으로 돌출시키는 것”13)이라고 했다. 이제 그는 반걸음 후퇴하여 자신이 했던 방식을 뒤집는다.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극단까지 몰고 가면 어찌 되는지 보여주겠다. 그렇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 새희와 지우 사이의 사랑은 한낮의 햇빛처럼 밝지만 왠지 모를 아스라함으로 불안하고, 이내 영화는 예정된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연쇄적으로 빠져 들어간다. 결국 지우로 추정되는 남자의 끔찍한 죽음과 새희의 정신적 파멸은 다름 아닌 공포를 피해 끝까지 간 결과이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끝내 공포로부터의 도피, 그 자체를 무화시키고야 만다. 새희는 두 번째 성형수술을 통해 또 다시 다른 누군가가 되는데, 이는 첫 번째 수술을 무력화시킨다. 차이의 무한 생성, 달라짐의 반복은 결국 달라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관객으로부터 의외로 ‘대중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간」은 역설적으로 김기덕 감독의 자기확인이며 자기방어인 셈이다. 결코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이상하게 슬프네요”라는 새희의 말은 곧 감독의 발언이다. 대중이 원하는 공포로부터의 해방, 그것은 존재할 수도 없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감독 자신의 입장의 재확인인 셈이다.

평론가들은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서 보이는 시각 이미지의 뛰어남에 대해서는 호평을 하면서도 이미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분개하거나,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렇게 “내용, 주제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시각 이미지는 뛰어나다는 식의 평가”에 대해 김기덕은 이렇게 항변한다. “이미지는 파편일 수밖에 없다. 내 영화는 파편적이지 않다. 일관적인 이미지를 통한 삶의 아이러니,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가 아닌 의미를 담아냈다.”14) 그는 이제 야생적이고 강렬한 이미지와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상상력, 독특한 직접 화법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통한 의미 전달에 골몰하고 있다. 이것이 「시간」을 통해 김기덕적인 것을 다시 규정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화면을 가득 메운 물의 이미지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로 덩그러니 남은 시간을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각주

1) “어떤 면에선 내 서투름이 말끔히 씻겨져선 안 된다는 생각도 한다.”: 남동철, “김기덕 인터뷰”, 「씨네21」, Vol. 250 (2000. 5. 2~9), p. 50.

“지나친 비약과 작위적인 구성에서 얻어지는 상승효과를 더 크게 생각한다. 그게 영화라는 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넌센스가 아닌가 한다.” : 주성철, “나쁜 남자 - 김기덕 감독의 ‘운명’에 관한 해부: 소년, 소녀를 후리다”, 「키노」, Vol. 80 (2001년 12월 호), p. 151.

“모든 사람이 우회하려고 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 김기덕은 바로 질러간다. 화면에서 잘라낼 수 있지만 자르는 데 따르는 위험을 알기 때문에. (중략) 내 색깔을 죽이면서까지 우회할 마음 없다.”: 김영진, "내 영화는 바이러스다 - 김기덕 인터뷰", 「FILM 2.0」, 2000.6.30.(http://www.film2.co.kr/people/people_final.asp?mkey=143)

2) 이영재 역, “장선우 + 김기덕 + 임상수 - 나쁜 작가주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 「키노」, Vol. 71 (2001년 1월호), p. 124.

3) 정한석, “<시간>의 배우, 하정우 - 김기덕 감독은 한국의 셰익스피어다”, 「씨네21」, 2006. 08. 28. (http://www.cine21.com/Article/ article_view.php?mm=005002002&article_id =40951)

4) 주성철, op. cit., p. 148.

5) “영화라는 것은 도덕성이라는 기준과 원칙 밖에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남동철, op. cit., p. 50.

6) 웃음을 유발하는 대표적 장면으로 다음의 다섯 장면을 들고자 한다.
① 지우가 모텔에서 술집여자와 포옹하자 밖에서 누군가 유리창을 깨는데, 이때 달려 들어온 모텔 주인이 왜 유리를 깨고 난리냐며 지우에게 다짜고짜 화를 낸다.
② 지우는 친구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다른 여자에게 알려줬다는 사실을 듣고 화를 내지만, 바로 다음 장면에서 새벽까지 전화를 기다리다 전화가 오지 않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화를 낸다.
③ 새희가 ‘세희’라는 이름의 ‘세’위에 ‘새’를 덧쓰자 지우가 짜증을 내며 펜을 빼앗는다. 집에 돌아온 지우는 칼로 새희가 덧쓴 획을 긁어 지운다.
④ 극렬한 자아의 분열을 경험하는 새희는 자고 있는 지우의 뺨을 세게 때린다. 잠에서 깬 지우는 “때리지마. 또 때리면 화낼 거야”라고 말하고 다시 잔다.
⑤ 새희가 세희의 가면을 떨어뜨린 채 수술실에서 나가자 의사가 그 가면을 써보고, 들어온 간호사에게 한 번 써보라고 권하며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좋아요’라고 말한다.

7) “고백하자면 난 관객을 공격하고 싶은 성향이 강하다.”: 김영진, “내 영화는 풀 한 포기 같은 것, 그걸 키울 자신 있다 -김기덕 감독과 토니 레인즈의 대화”, 「씨네21」, 2001.3.15. (http://www.film2.co.kr/people/people_final.asp?mkey=682)

8) “김기덕은 <시간>에 이르러 실존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가장 평범한 연인들을 등장시킨다. <섬> <나쁜 남자> <해안선> <활> 등 다른 영화의 연인들처럼 소외돼 있는 사회의 주변인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그저 평범하게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적당히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교제하는 연인들이다.”: 주성철, “김기덕의 근원적 성찰”, FILM 2.0, 2006.8.18. (http://www.film2.co.kr/moviedb/movie_review.asp?mkey=40999)

9) 질 들뢰즈,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p. 249.

10) 김영진, op. cit.

11) “현실 안에서 장 감독님이 찾으려고 하는 건강한 행복이라는 건 공처럼 숨어 있지도 않을 것이고 찾아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오히려 오해에서 이해로 바뀌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시키는 부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바로 추상성이죠. 심리적으로 행복해지는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실의 증오를 걸러낼 수 있는 환타지를 만들어내는 것. 실질적으로 신분이 바뀌거나 삶은 바뀌어지지 않지만 사회를 이해하는 관념은 바뀌었으면 하며 그런 영화를 앞으로 만들고 싶어요.”: 이영재 역, op. cit., p. 127.

12) 남동철, op. cit., p.50.

13) 주성철, “김기덕의 수취인 불명 - 자기 영화의 근원을 찾아 나선 절망적 시선”, 「키노」, Vol. 74 (2001년 6월 호), p. 69.

14) 김영진, op.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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