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시인)

관악 기슭의 새로운 벗들에게 내가 권할 것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여행이다.

여행이란 여행사의 소비상품이 아니라, 인간정신의 생필품이다. 어디를 권할까. 뉴욕일까, 파리일까. 그런 곳은 내가 알 바 없다.

불현듯 제3세계라는 낱말이 떠오른다. 이 낱말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의 한 지리학자가 지어낸 뒤 사르트르의 입방아로 세계의 개념이 되었다.

대체로 식민지 지역이나 신생독립국가 지역이 거기에 해당된다. 이로써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에 걸친 광대한 공간의 정치적 자각을 뜻하는 과정이 있었다.

오늘의 세계인식에서 이런 제3세계 담론은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 실체가 몽땅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이 지역의 난제들은 지속적이다.
하지만 이 지역과 우리는 추상화된 것 말고는 정작 친숙한 경험을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간의 우리 현대사는 미국 및 서방세계 쪽으로 얼굴을 향해왔다. 근대화는 서구화라는 도식에 어영부영 적응해 온 것이다. 이런 나머지 우리의 삶 영역에 우선적으로 맞닿아 있어야 할 아시아 각 방면에의 관심은 뒤늦게 발아하고 있다.

여기에 여행의 의미가 생겨난다. 오랫동안 잃어버린 장소들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우리에게 불가피한 무대를 설정할 것이다.

가령 중국 동북부, 만주와 몽골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와 바이칼호 일대, 중앙아시아의 생소한 풍경 속에 우리의 발길이 드나들어야 한다.

대학생이던 체 게바라가 친구와 함께 남아메리카 8천 킬로미터를 횡단한 여행은 꿈과 현실이 얼마나 동떨어지지 않은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관악의 그대들은 오직 이곳의 선택만으로 행복해질 것이 아니라 이곳 밖의 이웃과 세상에의 실감과 더불어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세계화의 때이다. 이것은 하나하나의 자기화 없이는, 경계와 경계 사이의 다양화 없이는 무지무지한 노예화인 줄 알아야 할 때이다.

그대들이여 몽골에 가라. 가서 9일 밤낮 이어지는 기나긴 구비문학의 서사시 세계에 고개 숙여라. 그대들의 선배가 너무 많이 타자의 오리엔탈리즘에 노출되었으므로 그대들은 자신의 오리엔탈리즘을 세워보거라.

그런 다음 지구적(地球的)인 전망을 시작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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