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당시 ‘통합신당’ 원내대표였던 김근태 의원을 인터뷰할 때 겪은 일이다. 학생 기자 노릇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정말 지겹게도 물었던 질문이지만, 나름대로 원내 개혁세력이라는 신당의 대표를 만난 터라 다시 한 번 물었다. “대체 국가보안법은 어떻게 할 건가?”

 

그런데 김 의원이 대뜸 “자네는 대학교 4학년씩이나 돼서 그만한 상식도 없나? 국회에서 과반수가 안되면 통과가 안 되는 거다”라고 몰아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차기 총선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에 동의하는 의원이 절반 이상 뽑혀야 실현이 가능하다고 항변인지 투정인지 모를 말을 늘어놓았다. 국민의 요구를 경청해야 할 정치인의 태도로는 너무나도 오만불손한 김 의원의 마지막 말은 짧고도 분명했다. “뽑기를 잘 뽑아 놓고 뭘 하라고 해야지…”

 

그 문답이 오간 후 나도 김 의원도 다소 격앙된 감정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말았다.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김 의원은 ‘개혁적 정치인’을 몰라주는 국민들에 대해 답답한 심정이었고, 나는 국민을(또한 기자 본인을) ‘감히’ 훈계하려는 한 정치인의 태도가 꽤나 거슬렸던 것 같다.

 

후보들의 갖가지 기만에 넘어갈 때
유권자는 돌잔치의 아이로 전락하고 말 것

 

정치인의 수준이 아니라 국민의 수준을 문제삼았던 김 의원의 말이 다시 떠오른 건 얼마 전 대선자금 특검법안이 국회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특검법은 자신의 치부를 속속 드러내고 있는 검찰 수사에 대한 거대 야당의 ‘딴지걸기’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 특검법을 통과시킨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손으로 뽑아 놓은 ‘국민의 대표’들이었다. 그에 반해 목이 날아갈 위협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해 수사의 칼을 뽑은 이들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들인 검찰이었다.

 

어찌 보면 지금의 형국은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난도질당하는, 민주성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야유와 손가락질이 집중되고 있는 곳은 대검 중수부가 아니라 바로 국회다. 그들을 선출한 국민들이 어찌 그 야유와 손가락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정치인은 우선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이고 또 당파의 이해를 고려해야 하는 정당인이다. 하지만 표를 얻으려면 국민의 편이라는 이미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선거판에서는 개인 또는 당파의 이익을 국민의 이익으로 보이게 하려는 갖가지 기만 전술들이 펼쳐진다. 여기서 이 기만 전술이 어느 수준까지 먹히느냐는 국민의 의식 수준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민생 현안들을 제쳐두고 당파 싸움에만 몰두하는 일선 정치인들을 욕하면서도 마음이 썩 편치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말 뽑기를 잘 뽑아놓고 욕하는 것인가 하는 자책감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색색의 ‘선본 단풍’이 화려한 걸 보니 관악에도 선거철이 한창이다. 매년 학생회 선거철마다 들리는 말 중에 결코 쉽게 흘려듣지 못할 말이 바로 ‘선거는 이미지’라는 말이다. 이 말에는 표를 모으려는 사람, 던지려는 사람 모두 어느 정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학생 유권자들에게 이 말은 더 없이 모욕적인 말이다. 자신의 대표를 뽑기 위해 고민하는 유권자들을 마치 돌잔치에서 실과 연필과 돈 중에 무얼 집을까 망설이는 아이 정도로 보고 있지 않은가.

 

총학 투표가 며칠 남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뜨고 각 후보들이 내놓은 공약들을 살펴보자. 이번에도 단지 선심성 공약과 이미지만으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보는, 학생들을 돌잔치의 아이로 여기는 후보는 없는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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