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호 3월 19일자 8면 ‘신림동 유사성행위 업소’ 기획을 읽고

지성의 전당에 뿌려진 신문이라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성매매 업소의 실태에 대해 취재한다는 명목으로 성매매 업소를 이용하고 와서 그것을 ‘르포’의 이름을 빌려 썼다니 실망스럽다.

기사에서 ‘서비스’라고 언급한 본격적인 유사성행위는 제공받지 않은 채 마사지만 받았고 그러한 업소를 취재라는 이름을 빌려 이용했다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성의 판매는 단순한 성기 접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녹두거리에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토킹바’, ‘비키니바’ 등에서 볼 수 있듯, 거래 대상으로서 여성의 성은 성기 접촉뿐 아니라 대화를 나누거나 몸을 보여주는 수준 등 구매자들이 원하는 모든 부분에 걸쳐 있다. 접촉노출 수준과 무관하게 판매대상으로서의 여성과 구매자로서의 남성은 평등하지 않다.

성매매가 여성의 인격을 파괴하는 이유는 이러한 권력적 주종관계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용자의 신분이 취재기자든 아니든, 서비스의 수위가 ‘본격적인 서비스’든 그저 단순한 ‘마사지’든, 손님 대 종업원의 관계로서의 만남은 억압적이고, 여성이 판매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취재기자는 취재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종업원 여성에게 그 취재는 자신의 성(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대화나 친절한 태도까지도)과 관련된 것을 판매하는 과정의 일부였을 것이다. 취재기자는 종업원으로서 억압적 위치에 놓인 여성과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느냐고 묻는 업주 사이의 착취관계에 참여한 것뿐이다.

기사 내용도 문제다. ‘이중문을 열어주는 구조’, ‘단속으로부터의 안전함’, ‘어두운 분위기’, ‘이용시간’, ‘이용대금’…. 도대체 이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했으며,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가. 녹두거리에 가득 뿌려진 성매매업소의 광고전단과 무엇이 다른가.

진정 여성의 상품화와 성매매 업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종업원 여성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방식에서부터 기사가 낳을 효과까지도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옳지도 못했고, 유익하지도 못했다. 성매매 업소에 대한 접근성만 높여준 꼴이다.

이태백 경제학부·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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