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방영 중인 KBS 2TV 개그 콘서트 프로그램에 「같기도」라는 코너가 있다. 그 프로를 한참 재밌게 보았다. 이 코너에서 개그맨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권법을 사용한다. 가장 어중간한 상태를 지닌 사람이 최고수다. 그래서 상대방보다 더 어중간한 상황을 연출하는 사람이 상대를 이긴다. 예를 들어 “여긴 월세도 아니고 전세도 아니여”, “이건 앉은 것도 아니고 선 것도 아니여”라며 최대한 어중간한 멘트와 행동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이러한 멘트는 즐거움을 준다. 껄껄 웃는다. 이런 큰 웃음을 주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웃음의 미학은 설명하기 어렵다. 상대방을 울리는 것보다 웃기는 것은 더욱 심층적이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상된 상황 연출은 웃음을 주지 못한다. 상대방의 허를 찔러야 한다. 그래야 웃음이 터져 나온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웃음은 시대의 맥락을 잘 읽어야 가능하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려면 구체적인 시대 맥락에 닿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웃음의 유행은 동시대 역사의 흐름이다.

이 두 가지 미학을 적절히 배합한 코너가 「같기도」다. ‘같기도’ 공격은 예측을 벗어난다. 상상하지 못했던 중간의 영역을 공격한다. 이는 언제나 명확한 구별 속에 무언가를 이해하던 우리네 사고와 엇갈린다. 그래서 그 엇갈림은 예상의 영역을 벗어나 우리네 허점을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웃게 된다.

동시에 「같기도」는 현시대를 잘 읽어 내고 있다. 개혁, 개방, 자유화, 합병…. 세계화시대에 모든 영역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많은 것이 유입되고 많은 것이 유출된다. 예전의 안정적 노동자는 더 이상 ‘표준’ 노동자가 아니다. 언제나 해고될 수 있고 반대로 언제나 더 좋은 회사로 스카우트될 수도 있는 사회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제 자본은 형식적 포섭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을 확립했다. 그래서 더욱 많은 것은 그 경계가 무너지고 더 많은 잉여 노동은 포섭될 것이다.

이런 경계 허물어짐의 현상. 「같기도」 최고의 상태인 현재에, 역설적으로 「같기도」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지점이 존재한다. 그 지점은 아마 양극화(兩極化)가 아닐까? 모든 것이 혼종하는 시대에 유일하게 양극화의 구별선은 더욱 명확해진다. 아니 더욱 혼종하고 경계가 무너질수록 양극화는 더 심각해진다. 소수는 더욱 많은 부를 영위하고, 생활이 곤고(困苦)한 사람은 더욱 많아진다.

이처럼 「같기도」는 표피적 혼종과 세계화 속에 자리한 한국의 ‘같기도(道) 사회’를 적확하게 드러내는 코미디다. 우리는 ‘같기도’가 결코 통하지 않는 양극화 사회를 살며 「같기도」를 보고 웃는다. 「같기도」는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일종의 팬터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현실의 모순을 잘 드러낸다. 그 웃음을 그냥 웃고 넘기지 말자. 웃음을 유발하는 사회 속을 들추어 보자. ‘웃기는 사회 현상’들에 직면할 것이다. 사회에서 배제되는 존재들, 잊히는 존재들, 그네들은 이주노동자일 수도 있고, 하루 벌이 노동자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김도민
 국사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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