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3월이 끝나가는 월요일 아침. 레트로 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학교 갈 준비를 마친 나는 지하철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손에 잡는다. 책은 친근한 느낌의 손글씨체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강의실에 도착하자마자 교수님이 들어오시고 수업이 시작된다. 강의 내용을 아노토펜으로 꼼꼼히 받아적기 시작한다.

#2. 집에 도착한 나는 필기한 내용이 담긴 아노토펜의 데이터를 컴퓨터에 옮기고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확인한다. 방명록엔 얼마 전 일촌이 된 ‘현대사회와 아날로그의 이해’과목 조별 과제 조장이 ‘오늘 오후 8시 MSN에서 모여요^^’라는 글을 남겨 놓았다. 곧바로 메신저에 접속해 잉크대화로 대화를 나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내 글씨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3. 과제를 정리하고 나니 벌써 12시. 수동카메라 모습을 쏙 빼닮은 디지털 카메라로 친구들을 찍어줄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든다.

아날로그 축음기와 유사한 복고풍 외형을 가진 레트로(retro) CD 플레이어, 종이에 쓴 글씨를 그대로 저장했다가 PC로 옮길 수 있는(종이에 쓴 글씨펜의 위치 정보를 감지해 그 행적을 글씨로 보여주는) 아노토펜은 디지털이 새롭게 아날로그의 옷을 입은 제품들이다. 손글씨 폰트와 잉크대화, 싸이월드의 일촌은 인간적이고 친근한 아날로그의 감성을 디지털로 표현하는 인터넷 공간으로끌어들인 사례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국제디자인트렌드센터 주임연구원 고정식씨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가 새롭게 주목받는 이유를 “아날로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으로,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날로그를 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인기는 감성적 차원 뿐 아니라 산업적 차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LG경제연구원 박동욱씨는 “소비자들은 기존 아날로그 공간에서 누렸던 아날로그의 매력을 디지털 기기를 통해서도 누리길 원하고 있다”며 “여러 기술을 융합시키는 산업 기술의 발전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인간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을 뜻하는 말로 넓게 해석하기도 한다. 디지털(digital)과 아날로그(analog)를 결합해 만든 신조어 ‘디지로그(digilog)’는 이런 아날로그의 새로운 위상을 잘 나타낸다. 『디지로그』의 저자 이어령씨는 시루떡을 돌려먹는 문화를 한 예로 들면서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의 속성이 이와 흡사하다는 말로 인터넷 공간의 디지로그적 속성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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