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진 교수 국사학과, 인문대 학장

 

서울대 병원의 ‘대한의원 100주년, 제중원 122주년’ 행사를 놓고 두 가지 논쟁이 불거졌다. 하나는 제중원 승계를 둘러싼 연세대와의 시비, 다른 하나는 일제의 대한의원을 왜 서울대가 기념하느냐는 일제 잔재 시비다. 이번 논쟁을 보건대, 그간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발굴됐는데도 부정론 측이 이를 거의 참작하지 않아 쳇바퀴를 돈 감이 있다.


먼저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관계를 보자. 제중원은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 알렌이 조선정부에 건의해 1885년 3월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세대가 이를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브란스 병원은 알렌의 후임으로 1893년 서울에 온 에비슨이 1900년에 거액의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운 것이다. 현재의 연세대는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합친 것이다. 연세대는 알렌과 에비슨의 선후임 관계를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에 그대로 적용해 제중원을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 연세대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설명체계는 제중원이 알렌의 병원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면 그냥 무너지고 말 수 있다. 


최근 서울대 병원사연구실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기록인 『통서일기(統署日記)』를 통해 새로운 관련 사실들을 밝혔다. 즉 제중원은 박문국과 함께 당시 최고관부인 통리아문에 직속하는 기구로, 알렌은 다만 급료를 받고 근무한 의사에 불과했다. 제중원은 2년 전에 폐지된 혜민서와 활인서의 재원(財源)에 인천․부산․원산의 해관세(海關稅)의 일부를 할당받아 운영된 ‘국립병원’이었다. 소속 의사들은 통리아문의 독판(督辦)의 감독을 받기까지 했다.


지금까지는 이런 기초 자료를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 북장로회 기록에 일방적으로 의존한 결과 맥락을 잘못 잡은 것이다. 에비슨은 1894년 7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사건 때 권총을 차고 군주를 지켜 큰 신뢰를 얻었다. 그후 일본이 내부에 위생국을 두고 제중원을 무력화시키려고 하자 군주는 그에게 관리 전권을 위탁했다. 연세대는 이를 선교부에 대한 이양으로 간주하지만 대한제국 출범 후 제중원은 다시 외부 관할로 돌아왔다.


다음, 대한의원을 둘러싼 일제 잔재 시비를 보자. 개명군주 고종의 개화사업은 청국과 일본의 방해로 순조롭지 못했다. 청일전쟁 중에 주권을 위협받다가 ‘아관파천’으로 상황을 반전시켜 군주권을 회복한 뒤 대한제국을 출범시켜 그간 못다 한 근대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의료 분야도 1899년에 학부에 의학교, 내부에 직할 병원(1900년 광제원으로 개칭)을 각각 새로 두었다. 1901년에는 원수부 산하에 육군병원을 세우고 궁내부(황실) 직속 병원의 신설도 계획했다. 후자는 1903년 제네바 만국적십자대회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독립국으로서의 국제적 기반 확립을 위해 적십자병원의 설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전시병력으로 1905년 11월 보호조약을 강제하고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세워 내정까지 간섭했다. 통감부는 그간 대한제국이 세운 학부 의학교, 광제원, 육군병원, 적십자병원 등을 합쳐 1907년 3월 대한의원을 발족시켰다. 대한의원의 설립에는 이처럼 통감부의 의도가 작용했지만 내용물은 모두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의 성과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이 이룬 전기, 광산, 은행, 의료 등의 성과를 ‘자치육성’의 이름으로 저들의 치적으로 돌렸다. 이런데도 대한의원을 버릴 것인가?


대한의원은 경모궁(景慕宮) 자리에 섰다. 이 궁에 모셔진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위패는 1899년 장조(莊祖)로의 추존으로 종묘로 옮겨져 궁 자리의 용도 변경이 가능해졌다. 궁내부 직속 병원의 설립 계획이 바로 이때 나온 것은 이곳이 새 병원의 부지로 상정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건물에 첨탑 시계가 시설된 것이 한 방증이다. 당시로써 시계탑은 군주권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군주 외에 누구도 시설할 수 없었다. 일제가 세운 것이라면 시계첨탑 사면에 태극 문양이 그려질 수 없지 않은가? 통감부의 압력은 아직 이 상징을 제거하는 데까지는 못 미쳤다. 학부 의학교, 광제원 그리고 대한의원의 역사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전사(前史)가 될 수도 있는 것이므로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요한다.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