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소설가 권여선씨

우리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지만 어쩌면 극도의 혼돈과 파열을 간절히 바라는지도 모른다. ‘뜨거움과 조잡함이 우윳빛으로 뒤엉킨 순댓국 같은’(「가을이 오면」) 일상을 ‘고치처럼 툭 터지면서 팔랑거리는 두 개의 날개’(「분홍 리본의 시절」)로 폭발시키는 힘을 가진 그를 만났다.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권여선씨는 8년 후인 2004년 소설집 『처녀치마』를 펴냈고, 지난달 두 번째 소설집 『분홍 리본의 시절』을 내놓았다. 『분홍 리본의 시절』에 실린 단편 「가을이 오면」은 지난해 황순원문학상 최종심에 올랐고 「약콩이 끓는 동안」은 올해 이상문학상 우수작으로 뽑혀서 평단과 독자의 이목을 끌었다. 『분홍 리본의 시절』은 최근 동인문학상 최종심의 후보작으로 검토되고 있는 중이다.

스치는 일상을 특유의 언어감각으로 묘파하는 그의 소설은 존재감 없고(「가을이 오면」) 주변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힘든(「약콩이 끓는 동안」) 인물들의 심리를 좇는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만남과 헤어짐의 일상을 쌓아가다가 어느 시점에서 ‘밀봉’해 왔던 내면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분홍 리본의 시절」의 주인공이 격렬하게 토해내는 마지막 말이 그 절정이다. “네가 진정 가슴을 치고 울어본 적이 있느냐. 남자나 실연 때문이 아니라 네 하찮음, 네 우열함, 네 교정되지 않는 악마성 때문에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삶을 저주해본 적이 있느냐.”

“사람들은 큰 일이 닥치면 덤덤해지는 반면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폭발할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전 그런 사람의 심리를 다루고 싶어요. 특히 멀쩡한 사람이 약이 바짝 오르면 어떻게 되나 궁금해요.” 그의 이러한 소설관은 ‘글은 글재주로 쓰는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로 쓰는 것’이라는 문학평론가 최원식 교수(인하대·국어국문학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곧 삶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늘 집에서 나물 무쳐 밥해 먹는다”는 권여선씨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매일 하는 활동을 소설에서 단지 ‘음식을 먹었다’ 정도로만 묘사하면 맛없는 음식을 먹은 것처럼 화가 난다”고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인지 된장국 하나에도 ‘텃밭에서 갓 뽑아낸 햇배추를 빗금 치듯 툭툭 칼로 내리쳐 된장 푼 쌀뜨물에 살캉하게 끓여 먹는 그 맛. 순하고 깊고 구수하고 달큰한 맛.’(「가을이 오면」)과 같은 감각적인 묘사를 선사한다. ‘잇몸 같은 어머니는 실은 날간처럼 싱싱하고 붉었고, 미역처럼 미끄럽고 천덩거렸다’(「가을이 오면」)는 표현도 그만의 매력적인 문체의 한 사례다. 이에 대해 그는 “국어국문학과를 나와서 그런지 예전에는 문법에 많이 신경을 썼는데, 정작 좋은 글은 ‘문법 감각’이 아니라 ‘언어 감각’으로 쓰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1983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1991년 같은 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인하대 한국어문학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폐간된 『상상』이라는 잡지에 큰 뜻 없이 응모해 수상하면서 단숨에 주목받았지만, 그 이후 공백 기간이 유난히 길었다. “등단 이후 글 쓰는 것마다 못 쓴다고 구박받고, 단편을 안 썼더니 알아주지도 않더라구요. 그러더니 청탁이 끊겼어요. 책 내주겠다는 사람도 없고.”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잊혀진 소설가’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솔직한 대답이 이어졌다. 글의 영감은 어떻게 얻느냐는 질문에 그는 “영감 같은 거 없어요. 청탁이 들어오면 쓰는 거에요”라고 말한다. “무명작가의 설움을 알기 때문에 청탁에 거절을 잘 못해요. 이번 책의 작품들도 대부분 청탁을 받아 쓴 것들이에요. 일상생활에서 소소하게 겪은 것들이 청탁의 압박에 못 이겨 팍팍 튀어나오는 거죠.” 의외의 말을 담담히 풀어내는 그는 꾸밈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직업이 소설가인지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그럼 자신이 뭐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음. 나는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에요”라며 답한다. 논술 문제 출제하거나 시간강사로 강의하는 등 아르바이트만 해오고 그럴싸한 직장을 가져본 적 없다는 그는 “사는 데 별로 돈이 안 들어요. 세금도 안 내고 좋은데요?”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러고보니 유독 그는 어찌어찌하다 보니라는 말을 자주 썼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알바인생 진행 중”이라 답하는 그의 ‘어찌어찌하다 보니 인생'이 유난히 자유로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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