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빌라’에 남은 마지막 12가구

▲평화로운 아파트 단지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철거촌은 쓰레기 하치장에 다름 아니다. 군데군데 널려있는 가재도구들은 예전에 많은 사람이 살던 곳임을 말해줄 뿐 아니라 철거 당시의 긴박함을 보여준다. © 김응창 기자

일산 풍동지구를 찾아가는 데는 굳이 주소가 필요치 않다. 백화점과 공원, 고층아파트 사이로 거짓말같이 나타나는 폐허가 너무도 강렬한 생경함이기 때문이다. 집들은 옹벽만 남아 흉측하게 속을 드러내고, 거리 곳곳에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철거민들을 향해 있다. 철거반원들의 낙서를 보며 오히려 마음을 다잡는다는 김복자씨(46)는 “동네 주민 중 홧병이 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며 철거의 상흔을 말한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풍동ㆍ식사동일대는 99년 7월 택지지구로 지정된 이래 꾸준히 개발이 추진돼 왔다. 매입률이 50%를 넘으면 협상이 타결되지 않은 사유지도 강제 수용할 수 있는 토지수용법에 의해 주민들은 살고 있던 집에서 합법적으로 ‘쫓겨났다’.

 

25만평 규모에 500여 가구가 살던 풍동에는 현재 12가구만이 남아 있다. 12가구는 마지막 하나 남은 건물에 ‘풍동철거민대책협의회’(철대위)를 만들고 공동 생활 중이다. 성낙경씨(38)는 “할머니들이 반이 넘는데,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며 “고3 수험생에게 공부방도 못 주는 건 몰론이고 가족 모두가 숙식 해결만 간신히 하고 있다”고 토로한다. 이들에겐 정부에서 주는 일인당 10~20만원의 기초생활보장 보조금이 수입의 전부다. 노점상, 건설직 일용노동, 파출부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이곳 주민들은 공무집행 방해죄 등으로 수배되거나 구속집행유예 처분을 받아, 더 이상 생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태다.

 

용역 깡패 ‘깽판’치는 동안 경찰은 수수방관 구속,
집행유예, 수배 등으로 생업도 잃어

 

그러나 이들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냉정하다 못해 잔인하다. 10월 초, 수배자를 강제 연행하려던 경찰은 저지하는 이안순 할머니(80)의 팔을 꺾고 바닥에 패대기쳤다. 며칠간이나 병원을 다녔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몸 구석구석이 편치 않다. 마침 그날 비가 와서, 용역 철거반원은 평소의 두배인 100만원의 일당을 받았다고 한다.

 

채남병씨(45)는 “용역깡패 300여명이 ‘깽판’을 치는 동안 경찰은 3중으로 주위를 봉쇄해주고, 물대포와 포크레인까지 동원했다”고 지난달 28일 새벽에 벌어진 강제철거 상황을 전한다. 채씨는 “잠자고 있던 집이 포크레인에 무너져내리는 와중에 주민들은 가재도구 하나 챙기지 못하고 뛰어나와야 했다”며 “철거반의 돌팔매질에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허탈하게 웃었다. 그날 용역깡패의 죽도에 맞아 손목이 부러져 8주 진단과 수술을 받은 정하정 할머니(76) 등 주민 7명이 입원했고, 용역 철거반원 2명이 2주 진단을 받았다. 주민 홍희옥씨(50) 등은 폭행죄로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됐으나 철거반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철대위 12가구는 용역 철거반원들이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편히 잠들지 못한다. 다같이 둘러앉은 밥상에서도 낯선 발소리 하나에 분위기는 금세 팽팽해진다. 철거반이 버리고 간 방패와 쇠파이프, 부서진 건물 잔해에서 나온 철판으로 이중 삼중의 방어선을 쳤지만 고공크레인과 물대포에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주민들 스스로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할머니, 학생 구분 없이 2시간에 한번씩 규찰을 나서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다. 어제까지 포근하던 내 집이 갑자기 ‘흉가’가 되고, 삶의 공간이 송두리째 무너지고…풍동에 머물러 아침저녁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일이 그들에겐 고문이다.

 

그들은 평당 200만원에 불과한 토지보상가와 800만원에 육박하는 분양가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주민들의 요구는 개발이 불가피하다면 철거 후 이주 전에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달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무도 아니고, 선례를 남길 수 없다”는 대한주택공사 사업본부 김석수 보상과장의 말은 너무도 단호하다.

 

드라마 세트장 같은 풍동의 풍경은 그러나 분명 현실이다. 상도2동, 청진동 피맛골, 부천 소사동과 오정동, 대전 용두동에서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밤마다 불침번을 서며 지켜낸 철대위 사무실이 있는 건물이 ‘소망빌라’인 것도 연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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