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비정상’ 망언에도 침묵 강요당하는 ‘비정상인들’
이명박씨의 전근대적 사고, 수 십년 전에 용도 폐기됐어야

원선우 취재부장

2003년 4월, 한 젊은이가 고작 19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그는 성적소수자였고 자신을 옭매는 차별의 현실을 견뎌내기 어려웠다. 죽어서도 ‘아웃팅’을 걱정해야 했기에 세상에 본래 이름을 알릴 수 없었고 빈소에 영정조차 내걸지 못했다. 빈소에는 영정 대신 술, 담배, 녹차, 파운데이션, 수면제, 묵주가 올라왔다. 사람들은 그를 ‘육우당(六友堂)’이라고 불렀다. 짧고 외로운 삶의 곁을 지켜준 친구라곤 그 여섯이 전부였다.

2007년 5월, 지지율 40%를 넘나드는 한나라당 예비 대선후보 이명박씨는 말했다. “불구로 태어나는 경우 불가피한 낙태는 용납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성난 장애인 인권단체들의 시위가 잇따랐고, 여당·야당·언론의 집중포화가 작렬했다. 장애인들은 ‘차라리 장애인을 죽여라’라고 쓴 팻말을 들고 선거사무실을 점거했다. 이씨는 결국 ‘전국 480만 장애인’들의 분노…가 아닌 ‘표’를 의식한 듯 해명에 나섰다. ‘오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사실 이런 말도 했었다. “인간은 남녀가 결합해서 사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동성애에 반대한다.”

뭔가 수상쩍지 않은가. ‘불구 낙태 허용’ 망언에 한국의 장애인들은 자연스럽게 분노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만 ‘동성애 비정상’ 운운 막말에 한국의 성적소수자들은 ‘당연히’ 침묵하는 것이다. 이 침묵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인권수준을 적나라하게 웅변한다. 대낮에 선거사무실을 점거한다? ‘정상인’들이 “변태새끼”라는 욕설을 내뱉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나라는 성적소수자가 자신이 존재할 당연한 권리를 외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침묵은 그래서, 차라리 슬픈 체념처럼 느껴진다.

이명박씨의 말이 왜 폭력적인지 시시콜콜 논증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의 머리는 한반도를 시원하게 가로지르는 경부운하만큼이나 명쾌하게 ‘정상’과 ‘비정상’을 이분하는 데 이미 너무도 익숙할 테니까. 다만 명색이 제1야당의 유력 대선후보라는 인물이 단지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멀쩡한 사람들을 향해 ‘비정상’이라며 돌팔매를 날리고 있는데도 그 참람한 무식을 폭로하는 이들이 소수라는 현실은 우려스럽다. 언론도 낙태 발언 보도에만 적극적이다. 한국은 여전히 성적소수자 인권의 사각지대다.

그가 부르짖는 ‘국민소득 3만달러’를 달성한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 차별받지 않는다. ‘서울 봉헌’, ‘수도이전 저지 군대 동원’, ‘노조 비하’ 등 이어지는 그의 망언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벌써 수십 년 전 용도 폐기됐어야 할 전근대적 사고가 높은 지지율을 등에 업고 그 오만한 본색을 드러냈을 뿐이다. 하기야 일요일마다 전국 개신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이 나라를 다스리도록 해 주시옵소서”라는 ‘구국의 기도’가 ‘장로 이명박’의 지지율을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으니 서울시 봉헌이 헛되지는 않았다. 오만함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3년 전 국가인권위원회는 성적소수자 인권을 보호하려는 ‘차별금지법’을 권고했지만 아직 발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법안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저지 움직임도 상당하다. 유력 대선후보라는 사람은 성적소수자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의 최소치를 지키기는커녕 ‘비정상’ 망언을 내뱉고도 서울시를 바친 대가로 신에게 대통령직을 하사받을 지경이다. 육우당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2007년에 이르러 오히려 퇴행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식이 기이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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