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학생회, 교조화되지 않고 끊임없이 성찰해야”

총학생회장 선거가 한창인 지금, 84년 총학생회를 부활시키는 데 앞장선 백태웅 전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을 서면 인터뷰했다.

 

▲현재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는 이른바 ‘운동권’ 대 ‘비운동권’ 구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번 선거에서는 한 선본의 정후보가 “학생정치조직은 총학생회를 운동의 도구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보나?

총학생회가 운동권 대 비운동권의 구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조직이라는 것은 쉽게 ‘과두(寡頭)의 정캄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니까, 상이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동시에 경쟁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이 아닌가? 다만 운동권이 총학생회에 참가해서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지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 후배들의 학생활동이 학내문제와 사회문제를 균형있게 결합하면서 대학생의 시대적 역할을 더욱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에는 한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부여하는 소명이 있다. 그러한 소명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학생운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학생운동의 열정이 총학생회의 학생대표적 역할과 잘 결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학생운동은 97년 정권교체 이후 구심점을 잃고 점차 그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를 어떻게 평가하나?

학생운동은 언제나 다소간 사회의 이단이었다. 그것은 학생들이 갖는 혈기 넘치는 청년기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준비된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시작하고 보는 조급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생들이 교조화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혁신해 간다면, 결국은 여러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전체 학생들과 함께 나아가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8ㆍ90년대의 학생운동은 매우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다. 모든 시기의 학생운동이 꼭 그런 모양으로 진행돼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고 창조적인 실험들이 끊임없이 진행돼야 하고, 젊음의 힘을 시기마다 다른 형식으로 모아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학생운동이 일반 학생과 유리된 채 겉도는 현상을 불가피하고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꼭 많은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성을 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 학생들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함께 나아가기 위한 자성과 혁신이 계속돼야 한다.

 

 

▲사노맹 사건으로 기약없는 감옥살이를 하던 시절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 논의가 있었는데, 당시의 심정은 어땠나?

전ㆍ노의 사면 논의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정확한 성찰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치권의 밀실 논의였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비민주성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계속 구속ㆍ수배생활을 하는 반면, 그 장본인은 사면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저항했던 쿠데타 세력들이 결국 군사반란 및 부패의 책임을 지고 구속되기에 이른 과정이 위대한 국민의 성취라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전직 쿠데타 주역을 처벌한 사례는 아르헨티나와 그리스 등 몇 나라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지난 8ㆍ9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에 자랑해도 좋을만큼 성장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거쳐 정계에 입문한 사람들이 있는데, 학생운동 출신들이 정치권에 진출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학생운동 출신들이 정치권에 진출하여 신선한 새 흐름을 만들어 가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정치라는 것은 거의 3D 업종이나 마찬가지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추락한 정치를 구출하는 일에 젊은 세력들이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국민이 기대하는 만큼 멋진 새 정치를 선보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두고 볼 문제인 것 같다. 더러는 국회 내에서 기성 정치인들과 다름없는 무기력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어쩌면 현재의 당파적 정치구조에서는 불가피한 현상인지도 모르겠지만 잘하고 있는 분들도 있지 않나? 나는 청춘을 헌신하며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던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하루아침에 바뀐다고 보지는 않는다.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내년에 총선에 출마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런 얘기를 나도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출마를 하려면 일단 정치판에 가까이 가야 하는데 북미와 한국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지 않나.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상임중앙위원으로 활동한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가 있다면?

사노맹으로 활동했던 나와 여러 동료들의 활동 속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불의한 시대에 결단코 저항하겠다는 의지였다고 생각한다. 노태우 정권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고, 또 국가보안법의 날이 시퍼런 상황에서, 사회주의라는 것을 정면으로 제기했고, 또 조직의 명칭으로 사노맹이라는 과격한 이름을 채택한 것도 그 예다. 나에게 있어서 사노맹이 이루고자 했던 핵심적인 지향은 자유와 평등,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이었고, 그러한 기본적 지향이라는 점에서는 나는 아직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당시의 우리들의 지적 수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협소했는지, 또 우리가 현실문제를 생각하는 수준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모호했는지를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여러 차원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고, 이러한 일들에 우리 사회의 건강한 힘들이 모여 함께 노력을 기울여 가야 한다.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에서 인권법을 강의중인데, 최근 주된 관심사는 무엇인가?

아시아 지역의 지역 인권 시스템과 인권법에 대해서 연구 중이다. 전 세계에서 아시아 지역이 유일하게 지역 차원의 국가기구가 없고, 또 지역 인권 법원이나 인권 위원회도 없다. 오늘날 세계화와 함께 지역화가 진행되고 있다. 미주기구, 아프리카 기구, EU 등 정부간 기구와 다양한 차원에서의 지역적 협력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은 세계전체로 보면 여전히 변방으로 남아 있다. 아시아의 지역 인권 시스템을 매개로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지역 속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 나아가 전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계속 고민 중이다. 또한 국제인권법의 측면에서 한 국가가 세계와 접촉할 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법도 연구중이다.

 

 

▲국가보안법 철폐는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이 풀지 못한 숙제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가?

오래 전에 사문화됐고, 법 논리적으로도 더 이상 일관성을 갖지 못하는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존재하면서 구속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수치다. 특히 최근 송두율 교수를 구속함으로써 한국이 얼마나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법을 이용하고 있는가를 또 한번 각국에 선명하게 홍보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백태웅, 그는 누구인가

63년 1월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그는 전두환의 집권에 반대하는 광주 민중항쟁이 벌어진 이듬해인 81년 서울대 공법학과에 입학해 84년 서울대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으로 피선된다. 학원민주화와 사회민주화를 주창하면서 총학생회를 부활시키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인 그는 84년 10월에 제명되고 동시에 학원프락치 사건으로 전국에 지명 수배돼, 11월부터 이듬해인 85년 11월까지 1년간 징역을 산다.

이후에도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계속하다가, 92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다시 구속돼 국가보안법 상의 반국가단체 구성 및 수괴임무 종사죄라는 명목으로 1심에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 징역이 선고되고, 항소심에서 15년 징역이 확정된 후 6년 3개월여만에 김대중 정부때 특별 사면으로 98년에 석방되기에 이른다.

98년 김대중 정부에서 ‘386 영입론’이 나와, 70년대 말 80년대 초 학생운동 출신 일부 인사들이 ‘21세기를 이끌어갈 청년 모임’, ‘한국청년연합’, ‘학생운동대표자모임’ 등의 통합모임을 결성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백태웅 역시 당시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 출신들과 함께 ‘한국의 미래 제3의 힘’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기도 했으나, 그는 이정우씨(84년 총학생회장) 등과 함께 “여권과 결합하는 형식의 정치세력화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석방 후 1년이 지난 99년 8월에 미국에 있는 노틀담 법과대학의 국제인권법 석사과정(L.L.M.)을 이수하고, 현재는 국제인권법 박사과정(J.S.D.)을 밟으면서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법과대학에서 조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98년에 전경희씨와 결혼해 4개월 된 아들을 하나 두고 있다.

 

 

학도호국단에서 총학생회로

전두환 정권은 81년에 집권한 이후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 여러 면에서의 민주적 저항에 직면하면서 83년 11월에 소위 ‘학원 자율화 조캄를 발표한다.그에 따라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 내에서 새로운 ‘유화국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됐다. 소위 ‘학원 자율화 추진위원회론’(학자추론)과 ‘학생회 부활 추진위원회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학자추론은 정부에서 유화국면을 철회할 수 있으므로 비공개조직을 유지한채 공개 민주화운동은 특별위원회의 형식으로 제한적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논리였고, 학생회부활론은 일단 학원 민주화의 공간이 열렸으니 학생대표조직인 총학생회의 부활을 통해 학원을 민주화하고 사회민주화운동으로 확장해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태웅은 학생회 부활추진에 누구보다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상당기간의 의견 수렴과 설득 작업 이후 총의가 모여서 결국 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를 만드는 데 도달, 학생회 부활추진위원장을 맡아 서울대 총학생회를 1984년 말에 부활시키는 데 이른다. 물론 그 대가는 값비싼 것이었다. 당시 복학생 협의회장이었던 유시민씨를 비롯해 백태웅을 포함한 주요 학생간부들, 그리고 새로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이정우씨 등 7~8명이 한꺼번에 제명되고 구속 수배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끝에 전국 각 대학에서 연이어 총학생회가 구성되고, 결국 정부당국에서도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인정하는 법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총학생회의 부활은 곧 대학에서 학생활동을 학생 스스로 주도하고, 스스로 창조하는 민주주의의 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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