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된 시대착오, 퇴행하는 우리 사회

‘전향’,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성숙 막는 퇴행의 논리우리 철학과  강사ㆍ대학원생 59명은 송두율 교수가 구속된 10월 31일 구속 반대 성명서를 내고, 이후 기소가 결정되기까지 20일 동안 1인 릴레이 시위를 계속해 왔다. 독재 치하의 청년들에게 시대정신을 고민하게 했던 민주인사이자 국내 외에 인정받는 학자가 거물 간첩으로 둔갑하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동일 인물의 동일 행위에 어떻게 이 모순된 규정들이, 그리 순식간에 내려지게 되었을까. 우리가 이례적 행동에 돌입한 것은, 미친 듯한 속도에 제동을 걸고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볼 틈을 내기 위한 것이었다. 막상 우리 입장을 짤막한 구호로 정리하긴 쉽지 않았다. 찾아가서 항의해야 할 대상이 입법부인지, 사법부인지, 행정부인지, 언론인지 우왕좌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혼란이야말로 우리의 사회 현실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송두율 교수는 왜 우리 사회에 대해 착각했을까. 탈냉전이라는 세계의 변화, 진보적 성격의 정권 교체. 그러나 정권의 교체가 권력의 교체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분단세력은 생각보다 완강했다. 이를 간과한 채 그는 순진하게 귀국한 것이다. 정부측에나, 그를 지지해 왔던 소위 진보세력에게 그는 ‘뜨거운 감자’였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그나마 발언권을 얻은 것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깨끗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지난 과정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인 이들은 수구세력뿐이었다. 적대 이념에 북과의 연계라는 혐의까지. 송교수는 그들에게 딱맞는 먹이감이었다. 그들은 ‘남북화합’과 ‘탈분단’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고, 남북 대치라는 상황을 이용하여, 구시대 논리에 기대어 이를 요리했다. 송 교수에 따르면 ‘보수’는 정치적겣뎬痔û 타락에 맞서 의연하고 격조있는 태도를 보여주기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그에 비해 ‘반동(reaction)’은 수동적이어서 자기 특권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잔인한 동물적 반응을 보일 뿐이다. 분단을 이용해, 혐의 사실이 확정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송 교수를 심판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우리 사회 수구 세력의 퇴행적인 본능 앞에 송 교수는 먹이감이 되었던 셈이다.

 

계산된 시대착오의 효과는 송교수 개인의 고통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 사회 전체에서 어떤 퇴행이 일어났는지 보라. 죽어가던 국가보안법이 다시 살아났다. 무엇보다도 ‘반성과 참회’라는 이름으로 전향의 논리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송 교수가 ‘준법서약’을 했을 때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서는 ‘전향’하지 않았다면서 송 교수를 비난했다. 검찰에서도 송 교수가 노동당 후보위원이라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게 되자 자백과 전향을 구속 기소의 근거로 삼았다. 자백을 증거의 왕으로 보는 것은 구시대의 법 논리이다. “사상은 다르다는 이유로 처벌되어선 안 되며 오직 논쟁할 수 있을 뿐”이라는 1923년 ‘라드부르흐의 법언’은 이미 근대법의 일반 원칙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전향 제도는 이미 98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99년에는 준법서약서마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전향’의 논리가 다시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사상과 이념은 인간에게 정신적 목숨이다. 더구나 ‘전향’이 해당 사회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것도 이념적 생산성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사상을 버리면 받아주겠다는 건 정신적 자살을 교사하는 행위이며, 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성숙을 가로막는 퇴행의 논리이다.

 

송두율 교수는 냉전 시대, 적대적인 두 사회의 경계에 선 대가로 37년 간 귀국을 거부당했다. 그러나 그는 이역만리에서 한반도의 평화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했고 서구 중심주의에 빠져있던 우리에게 서구 철학을 자기화하는 방식을 제시해 주었다. 탈냉전의 시대, 경계에 서 있는 것은 이제 우리 사회다. 분단 시대의 논리로 그의 학문 활동에 친북의 딱지를 달고 퇴행하느냐, 탈분단의 시대정신으로 경계인의 입장을 수용하고 성숙의 자양분으로 삼느냐 라는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와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오기 바란다.

 

김은주 철학과 박사과정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