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자는 자기를 버리고 마음을 비워서 관찰하는 천분이 없고 천직(天職)의 실행과 그 진행에, 사색과 예감에 완전히 몰두하는 천분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는 영리하고 밝고 분별이 빨랐다. 그러나 그는 이기적인 의도와 목표 때문에 기우술(祈雨術)을 습득하려고 했음이 차차 드러났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자기의 역할에서 명성을 얻고,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주기를 원했다. 천분(天分)을 타고난 자가 아니라 재능(才能)을 타고난 자의 허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인기를 바랄 뿐 아니라 남을 지배하는 권력이나 이익을 노렸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요세프 크네히트의 유고(遺稿)> 중 재능을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사용한 마로에 대한 크네히트의 탄식이다. 그의 탄식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성격은 비열한데 지력은 높거나 상상력이 뛰어난 제자는 반드시 스승을 곤란하게 만드는 법이다. 제자를 가르쳐 정신생활에 협력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스승의 본분이지만 그 보다 한층 높은 본래의 의무는 단지 재능만 가진 파렴치한 인간에게는 학문과 비술을 감추고 지키는 일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스승이 어떤 종류의 매혹적인 재능은 두려워하고 꺼리는 이유이다. 그러한 제자는 가르침의 의미와 봉사를 완전히 비뚤어지게 해놓고 만다. 화려하게 비추일 수는 있어도 봉사할 수는 없는 그런 제자를 양성하는 것은 결국 봉사의 본의를 저버리고 정신에 대하여 배신을 범하는 일이 된다.’

 

크네히트의 두 제자 마로와 투루는 공히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각자가 선택한 삶은 이기적 삶과 봉사하는 삶이라는 상반된 길이었다. 도덕적 측면에서 이분법적으로 도식화된 이러한 구도는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진부한 설교에 더 가까워 보인다. 더 나아가 경제적 가치가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보자면 스승 크네히트의 탄식은 순진하다 못해 지극히 비현실적인 도덕주의자의 넋두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각자 선택한 삶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 선택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가 천분을 저버리는 것, 다시 말해 재능의 대가를 외면한 선택까지도 합리화시킬 수 있을까? 살아간다는 것과 무엇인가 선택한다는 것, 그 선택이 점심 메뉴에 불과하건 그의 인생을 좌지우지 할 만큼 중대한 것이건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단 한순간도 선택이라는 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구절 속의 ‘진리’는 그 사전적 의미에 앞서 ‘판단과 선택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올바른 판단과 선택의 기준으로서의 진리를 앎으로써, 다시 말해 삶의 매 순간을 그 진리에 비추어 보고 더 나아가 그 선택을 전적으로 진리에 맡김으로써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물론 그 진리가 종교적 신념이건, 합리적 지식이건, 개인적 가치관이건 그것 역시 선택하기 나름이지만.

 

타고난 재능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지,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 그것은 여전히 선택의 문제이다. 그 이유와 결과가 어떻든지, 그 선택 자체는 비록 비난이나 칭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선택이 부디 ‘마로의 선택’보다는 ‘크네히트와 투루의 선택’이기를 바래본다. 보다 나은 세상은 재능 있는 이들의 선택과 역할에 크게 의존하기에.

 

전상직 음대 교수 작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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