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준 건축학과․06


합리적인 사고는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과 밀착하기를 요구한다. 거리를 둔다 함은 객관적인 사고를 위한 것이요, 밀착된다는 것은 그 사안에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의 여론이 탈레반보다 기독교에 집중하는 이유는 탈레반이 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심리적으로 그것과 너무 멀기 때문이다. 네티즌이 흔히 그러하듯, 선교와 봉사의 이분법에 갇혀 이 사건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 또한 피랍자 혹은 기독교와 자신 사이에 타자화라는 선을 긋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타자화와 밀착은 다층적으로,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하며, 올바른 거리두기와 밀착이 이루어지지 않은 대화는 생산적인 토론으로 발전하기가 어렵다.

작금의 아프간 피랍사태와 관련한 이 사회의 논쟁은 서로 다른 가치의 대결이다. 종교의 논리와 정치의 논리, 일원성과 다원성, 객관성과 주관성이 충돌하는 이 논쟁의 장소는 실로 재미있는 하나의 실험계다. 이렇게 전혀 다른 사고 패턴을 가진 가치들의 만남은 토론자들이 각각의 가치들에 대해서 올바른 거리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안겨준다.

논쟁의 한 축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이 사건의 종교적인 함의에 밀착하려 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 사건의 구체적인 실체인 피랍자들과 밀착하려 하지만, 정작 이 사건의 더 넓은 다양한 함의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종교적 논리에 의해 일의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현실과 거리를 둔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그 다의성에 대한 철저한 무지의 최종적인 표현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도적으로 이 사건의 종교적 본질과 거리를 두며 추상적인 국익에 밀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비교적 합리적으로 현실을 인지하지만,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간 그 자체의 가치를 경시하며, 이로 인해 최종적으로는 국익 자체의 이상과도 괴리된다.

이제 배턴은 구상권 논의로 넘어왔다. 이는 그동안 의논하지 못했던 책임소재와 가치판단의 최종적인 결론이 될 것이다. 이제는 상대방과의 거리를 조금만 좁히자.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꿈은 현실을 좀먹을 수 있다. 그러나 꿈은 무릇 사람의 현실을 지배한다.

 피랍자는 그야말로 ‘피’랍자이다. 선교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다른 사람도 납치될 수 있다. 타자화만 난무하고 공감이 없는 대화는 그야말로 서로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볼테르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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