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나키스트의 상상력

리처드 포튼 지음┃박현선 옮김┃이후┃3만 2천원

거친 눈매의 살인마, 텁수룩한 수염의 극악무도한 폭탄테러범, 감정 없는 로봇. 모두 할리우드 상업영화와 유럽 예술영화가 묘사하는 아나키스트의 이미지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이른바 ‘주류 역사가’들에 의해 아나키즘이 멋대로 평가된 결과다.

실제로 ‘아나키즘’은 정형화된 개념이 아니다. ‘권위’를 부정하고 ‘평등에 기초한 자유’를 추구하며 ‘자발성’을 중요시하는 등의 특징이 드러나있을 뿐이다. 영화 속 이미지는 아나키스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영화사들의 정치적 노림수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 미국 영화계간지 「시네아스트(CINEASTE)」의 공동 편집위원인 영화학자 리처드 포튼(Richard Porton)은 『영화, 아나키스트의 상상력』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상쇄하고자 했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돼있다. 1장 ‘아나키즘과 영화’에서 리처드 포튼은 할리우드와 유럽영화 전반에 퍼져있는 아나키스트에 대한 일반인들의 고정관념을 열거한다. 이어 그는 2장 ‘영화, 아나키즘, 그리고 혁명’부터 5장 ‘아나키스트 미학을 찾아서’까지 아나키스트들의 자주적 활동을 탐구하고 촉진한 영화들을 파고든다.

저자는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아나키즘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지 알아본다. 실제로 프랑스 영화감독 장 비고(Jean Vigo)는 「품행제로(Zero de conduite)」(1933)를 통해 현재의 ‘학교 교육(schooling)’은 ‘교육(education)’을 빙자한 감금장치에 불과하며 앞으로 아동기의 자발성을 촉진시키는 교육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짐으로써 ‘아나키스트 교육학’ 개념을 영화 속에서 성공적으로 제시했다.

책 곳곳에서 저널리스트 리처드 포튼의 세밀함이 드러난다. 다른 책에서는 만나기 힘든 아나키스트 단체의 유인물과 영화사의 미공개 서신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부록에서는 본문에 서술된 아나키스트들과 150여편의 영화에 대한 부가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아나키즘의 진정한 면모를 맛보는 기쁨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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