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훈ㆍ문학평론가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아즈마 히로키 지음 / 이은미 옮김 / 문학동네 / 8천8백원

소설가 김영하가 한 일간지에 막바지 연재 중인 장편소설『퀴즈쇼』에는 창(窓) 없는 고시원에서 컴퓨터 모니터라는 유일한 창으로 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가난하고 고독한 주인공의 형상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라이프니츠의 ‘창 없는 단자’를 연상시키는 인터넷의 퀴즈동호회에서 가상의 아이디와 아바타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작중인물들은 자신들만의 취미공동체에서만큼은 활력과 생기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약속된 모임시간이 지나고 하나 둘씩 채팅방에서 빠져나가 마침내 주인공 한 명만이 남아서 커서만 깜빡이는 텅 빈 채팅방을 공허하게 응시하는 풍경에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자마자 밀어닥치는 남루한 현실세계에서 삶에 대한 전망이라고는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우울한 자화상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선험적 절망의 생리마저 엿보인다. IMF체제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소수독과점의 경제구조, 양극화 현상, 비정규직의 전면화 등 ‘삶의 자본화’ 또는 ‘삶의 생존전략화’라고 총칭할 수 있는 이 시대 젊음의 고단한 세상살이에 대한 김영하 식의 답변이자 그 자체로 뛰어난 반(反)성장소설인 『퀴즈쇼』의 젊은 주인공에게 삶의 모험이란 그 답의 정오(正誤)에 따라 생존의 당락(當落)마저 결정되는 퀴즈쇼로, 자기형성과정에 필수적인 교양(bildung)은 오직 퀴즈쇼를 위한 무질서하고도 단편적인 정보의 집적으로 코드화된다. 그리고 그동안 잘나고 편협한 기성세대는 한낱 일본문화에 대한 표피적이고도 몰이해적인 영향에 따라 자기폐쇄적인 세계에 틀어박혀 게임을 즐기는 이들 젊은이들을 경멸적인 어조를 담아 ‘오타쿠’라고 부르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의『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무엇보다도 오타쿠에 대한 상투화된 이미지에서 멀찌감치 탈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나아가 현시점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묘사하는 일본서브컬처의 진화는 한국문화(또는 한국문학)의 한 단면에 대한 성찰적 교사의 역할에 부합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문학의 장에서 시끄러웠던 ‘근대문학의 종언’ 이후의 문학(문화)을 상상하려면 이 비평가의 저작을 읽으면서 별도의 지형도를 그려보는 것도 괜찮겠다.


▲ 그래픽 : 차주영 기자


아즈마 히로키는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아사다 아키라(淺田彰), 오사와 마사치(大澤眞幸) 등의 계보를 잇는 신진 사상가로, 앞의 비평가들이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지금은 폐간된『비평공간』에 초기에는 자크 데리다와 프랑스 사상에 대한 글들을 주로 발표했으며, 현재는 일본애니메이션과 국내에도 유행하는 일본소설에 대한 비평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이미 여러 번 방한한 인연으로 한국에서 그는 애니메이션 비평가로 기우뚱하게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면모만큼이나 이 책에서처럼 오타쿠 문화에 대한 거시적인 분석과 그것을 감싸고 아우르는 저자의 지적 성찰이 주는 매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단연코 빛나는 장들은 헤겔주의자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eve)의 ‘역사의 종언’ 이후 인간적 삶과 욕망의 형상을 오타쿠계 서브컬처의 진화 단계에 대응시켜 비평적으로 삼투시키는 부분이다. 코제브가 1950년대에 예언한 역사의 종언이라는 서사는 ‘세계의 미국화’와 ‘일본의 세계화’로 각각 그 단계가 나뉜다. 전자가 인간적 욕망이 다만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고착된 ‘동물화하는 삶’이라면, 후자는 할복자살처럼 무의미한 형식적 게임과 의례의 연속인 ‘일본식 스노비즘’이다. 오타구문화를 생성한 일본의 서브컬처의 초기 역사는 전후(戰後)의 고도 성장기를 통해 미국의 소비지향적 삶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패전에 대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고도로 형식화된 에도문화와 같은 전근대적인 상상체계를 수용하는 이중의 모습을 보인다. 일본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거대한 로봇으로 합체되는 에도시대 성(城)이나 다연발 조총으로 무장한 닌자의 이미저리(imagery)는 그러한 예다.

미국화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미국화에 반발하는 오타쿠 문화에는 이처럼 동물화하는 삶과 스노비즘이 어떠한 충돌도 없이 기묘하게 동거하는 모습이 보인다. 따라서 혼란스럽게만 보이는 오타쿠 문화의 역사에서 의외로 특정한 패턴의 변화가 발견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흔히 오타쿠 문화를 큰 이야기의 종말과 작은 이야기들의 난립, 1차 창작(저자)의 소멸과 2차 창작(패러디, 인용)의 상승, 또는 오리지널의 후퇴와 시뮬라크르의 득세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사태를 오도하기에 딱 알맞다. 오히려 오타쿠 문화는 데이터베이스라는 정보의 심층구조와 그로부터 상이하게 조합되는 시뮬라크르라는 표층구조의 무모순적 병존으로, 인터넷 또는 이진수의 기호체계로 성립된 웹, HTML이라는 기성의 논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현실적 삶의 층위에서 심층과 표층의 이러한 병렬은 즉각적으로 필요한 정보와 취향을 소비하는 데이터베이스의 동물화된 삶과 시뮬라크르의 형식화된 유희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스노비즘의 공존이다. 이 세계는 부모 없는 소년소녀들만의 취향공동체이며, 그 너머에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위협의 그림자, 종말의 이미지로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순환적인 문화형식이 궁극적으로 표상하는 사회현실은 어떠한 모습일까.

아버지를 찾아가지만 결국에는 관능적인 계모들과 소녀들로 가득 찬 왕국과 맞닥뜨리는 한 게임서사가 암시하는 것처럼, 오타쿠 문화는 상징적 현실의 결핍과 상관이 있다. 저자가 다른 책에서 한 말을 빌면, 국가나 공동체 등 상징계의 부재와 그것의 결락을 메우려는 보수적 공동체주의의 회귀는 젊은 오타쿠 문화와 엉뚱한 곳에서 접속한다. 현해탄 건너의 이야기지만, 아즈마 히로키의 책은 한국의 문화적 현실에 대한 구부러진 막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김영하의『퀴즈쇼』에서 그러하듯, 창 없는 단자가 접속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즉각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영역이 아니라, 몸 둘 곳 없는 헐벗은 젊음이 자신을 맡기는 소도(蘇塗)에 더 가깝기도 하다. 이 포스트모던한 한국형 소도를 발굴하고 답사하는 일이 이 책의 독자에게 남겨진 과제다.

 

▲ 복도훈(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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