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서울대는 장애학생에게 전액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장애학생이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은 많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서울대에 합격한 장애인에게는 언론의 찬사가 쏟아졌는데, 나 역시 그러한 찬사를 받았지만 강의실에는 못 들어갔던 경험을 갖고 있다.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했을까.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런 환경쯤이야 극복하고 인간승리를 거두는 것이야말로 진정 감동스러운 일은 아니었을까? 그때 장애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장애인권연대사업팀(연대사업팀)’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할 수 있었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담론은 장애인을 미담의 주인공으로 만들면서 한편으로 이들의 실질적 권리를 배제하는 현실에 대해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이는 ‘나의 비극’에 좌절하던 스스로의 시선을 ‘우리의 문제’로 돌리는 커다란 경험이었다.

2007년 서울대는 장애학생이 다니기에 훨씬 좋은 곳이 됐지만 이제 연대사업팀은 사실상 휴면기에 들어가 있다. 당장의 절박한 요구사항이 줄어든 것도 큰 이유겠지만, 장애를 갖고 있건 그렇지 않건 연대사업팀에 들어와 새로운 소통방식과 인권담론을 고민하며 토론할 사람 자체가 거의 없다. 이는 당연히 연대사업팀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자치언론과 학회들이 문을 닫고 있고, 그들이 생산하던 치열한 고민과 성찰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학사회의 인문사회과학은 고루하고 ‘찌질한’ 담론이 될 만큼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2년간 10명의 서울대생이 자살했고, 신경정신과를 찾는 학우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비극일 뿐이며 ‘막장인생’들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일 뿐인가? 아직까지는 이 ‘막장주의’가 소위 ‘88만원 세대’의 유일한 담론인 것처럼 보인다.

비판적 시각의 고민은 그래서 여전히 중요하다. 인문사회과학 동아리들을 감상적으로 추억하거나 미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장애학생들이 직면한 문제가 그 개인의 비극만이 아니었듯이, 우울과 강박으로 시들어가는 우리의 ‘막장인생’은 단지 게으른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를 계몽하지 말라”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를 좀 계몽할 필요가 있다. 재테크 연구의 절반이면 충분하다.  

김원영 사회학과·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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