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신문』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중에 짚어야 할 부분이 있어 변호를 자처해 본다. 지난주 김두현씨가 썼던 것과 달리 요즘 나는 학교에서 게시판을 보는 재미가 사라졌다. 논쟁적인 대자보가 붙어서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흥미로워 보이는 행사 공지는 금방 가려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들을 대신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각종 경제, 경영 동아리들과 기업의 홍보 포스터다. 심지어 얼마 전엔 신차 출시를 알리는 포스터까지 붙어 놀랐던 적이 있다. 주변의 포스터를 보고 다양성을 느낀다는 김두현씨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심해져가는 획일성에 놀라는 것은 내가 세계에 대해 둔감하기 때문일까.

내가 느끼는 획일성이라는 것은 유용한 것에 대한 쏠림과 그렇지 못한 것들의 고사(枯死)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 참여자들의 의도가 어떻든 적어도 이력서 한 줄 정도는 채워줄 경제, 경영 동아리는 높은 경쟁률을 보이며 ‘리크루팅’이라는 단어까지를 사용할 수 있지만, 괜찮은 책 한 권 같이 읽어보자는 쓸모없는 제안을 후배들에게 건네기는 너무나도 어려워진 대학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대학에서 다양성을 느낄 수 있다면 어디에서일까. 늘어나는 경제, 경영 동아리의 수를 보고서일까.

사실 이러한 쓸모없는 것들의 위기는 사회과학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에도 철학에 대한 대중들의 무관심이 고대부터 있어왔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쓸모없는 것들의 역사는 언제나 위기의 역사였던 것이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 토익점수 향상이나 고시합격, ‘스펙’ 관리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유용하지 않다는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진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반성과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김두현씨는 동아리에는 우열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원주의를 옹호한다고 했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 나는 사회과학 동아리를 비롯해 한때 관악 곳곳에 퍼져 있던 쓸모없는 동아리의 소멸을 우려하는 것이다. 덜 배우고 덜 가진, 사회적으로 덜 쓸모있는 사람은 살아남기 어려운 사회, 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시공부도 하고 돈 들여 어학연수도 가고 사회과학 동아리 대신 투자 동아리를 두드리는 우리, 이것이 과연 살 만한 사회인지를 반성해보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영역 아닐까. 이것이 쓸모없기만 한 일일까.

 김정환  사회학과·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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