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음악과 인접학문 ④ 음악과 사회학 - 이경분 강사(음대 작곡과)

요즘 전반적으로 위기에 처한 클래식 음반시장에서도 푸르트벵글러(Furtwa¨ngler)의 음반은 여전히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 폭격과 사이렌 소리가 일상이 된 천년 제국의 패망을 눈앞에 보면서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베토벤의 심포니 음반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시공을 초월해 생명력을 발휘하는 음악해석을 단순히 그의 천재성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음악사회학에서는 낯선 일이다. 음악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이런 해석은 이것이 마지막 연주가 될지, 4악장 끝까지 연주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매우 불투명한 상황에서 오로지 음악에만 몰두하고 의미를 부여했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 필하모니 단원들과 청중 그리고 절박한 상황이 함께 만들어낸 공동작품이라 할 수 있다(작품과 연주를 구분해서 생각해야겠지만 지면상 여기서는 같은 것으로 다룬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음악사회학의 방법적 난제가 숨어 있다. 푸르트벵글러 음반을 듣는 21세기 수용자의 입장에서 볼 때, 우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정말 음악 속에 시대적 상황이 압축된 코드가 들어 있는가, 아니면 특정 상황, 특정 사회의 수용자가 듣고자 하는 것을 듣는 것은 아닌가, 즉 수용자가 특정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음악(연주) 자체에 시대적인 것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분석적으로 설득력 있게 밝혀내는가 하는 문제다. 만약 베토벤, 말러, 안익태, 신중현의 음악에서 지나간 과거의 사회가 응축해 놓은 소리 복합체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는 것에 못지않은 흥미진진한 일이리라.

물론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음악 재료에서 응축된 사회적 코드를 들었지만, 그의 방법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모방되기 힘든 직관적이고, 비체계적인 것이었다. 아도르노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음악사회학 영역의 연구가 쏟아지고 있지만, 음악인ㆍ음악현상과 관련된 ‘사회학’적인 연구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면, ‘음악 자체’에 대한 얘기는 매우 소극적인 것도 이 문제의 해결책이 부재한 까닭이다. 어쩌면 오늘날 학문적이라고 말하는 방법론으로는 이 문제를 풀기 힘들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한국 음악사회학의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와 음악의 관계를 다양하게 조명해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문제제기가 오히려 더 절실해 보인다. ‘음악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음악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이뤄진다면 결국 음악행위를 하는 개인의 자기 이해도 깊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보여주기’의 정서가 팽배한 21세기 한국에서 서양음악은 어떤 사회적 상징성을 가지며, 자주 반복되는 연주곡목은 이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거의 매일 전국 어디에선가 초대권을 남발하는 ‘자기 출혈’ 클래식 음악회가 끊이지 않는 우리의 사회적ㆍ구조적 조건은 무엇인가? 광고음악의 변천을 시대적으로 따라가면 우리 사회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는가? 가입ㆍ구매 충동에 사로잡힌 소비자를 만드는 데 광고음악은 어떻게 기여하는가? 감정적이고 눈물 흘리는 장면이 많은 안방 드라마에서 음악의 역할은 무엇인가? 천만 관객 동원이라는 ‘대박영화’에서 음악은 어떻게 사용됐으며,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쏠림’의 정서를 부추기는 강력접착제 역할을 음악이 하는 것은 아닐까? 일제 강점기 서양음악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일본이라는 중간단계는 어떤 흔적을 남겼으며,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 청중의 역할은 무엇인가? 또 음반, 영화, 라디오 같은 대중매체와 트로트음악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박정희 독재정권은 국민의 자발적인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 음악을 어떻게 이용했는가? 등등. 음악사회학의 관심대상은 종횡무진 다양한 경계를 넘나든다. 음악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사람이 만든 것으로 이해한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 이경분 강사(음대 작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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