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승과 김애란, 우울한 시대를 다루는 두 가지 문학적 방식 - 함돈균 (문학평론가)

트랙과 들판의 별

황병승 지음┃문학과지성사┃212쪽┃6천원

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문학과지성사┃309쪽┃1만원






▲ 삽화 : 박혜빈 기자

2007년 가을, 황병승의 두 번째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뜻하는 일일까? 『여장남자 시코쿠』라는 시집 한 권으로 2000년대 ‘젊은 시’의 ‘기호’가 되어 버린 이 시인. 그의 시를 ‘미래파’(권혁웅)라고 부르건 ‘외계인 언어’(이장욱)라고 부르건, 혹은 도저히 ‘시’로서 승인할 수 없다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건 간에, 그의 ‘시’가 이후 한국시론사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점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마치 이상과 김수영의 텍스트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상기하게 할 만큼이나 치열했던, 2000년대 평단의 해석학적 투쟁이 동시에 관여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황병승의 첫 시집은 단지 시인의 언술로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발간 이후에야 해석학적 충돌의 장을 통해 비로소 의미화되는 ‘운동하는’ 텍스트였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첫 시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여장남자 시코쿠』의 주인공 ‘시코쿠’는 한국시에서 최초로 등장한 ‘자궁을 가진 남자’였다. 이는 한국시에서 양날의 칼을 가진 진정한 ‘타자’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젠더적 위치를 부여받을 수 없는 ‘게이 시코쿠’는 ‘남성/아버지’의 지배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내 욕망의 총체적 억압상황을 공격하면서,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시의 ‘대안 담론’처럼 등장했던 ‘여성시’의 ‘여성적 육체’조차도 지배담론 내의 특권적 기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폭로하였기 때문이다. 이 첫 시집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십대’라는 점도 문제적이다. 황병승의 ‘십대’들은 ‘가부장제-자본주의-국가주의-동일성의 지식체계’가 공모하여 구축한 전방위적 억압체계 속에서 상처받는 ‘경계’에 선 타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이 시집은 어른들이 만든 상징적 위계질서 내부/경계에서 혼종적 성정체성과 하위문화적 감수성을 통해, 고정된 ‘정상성’ 따위를 인정하지 않는 펑크적 에너지의 폭발적 흐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시집이 한국시 최후의 이데올로기인 ‘모국어적 염결성(廉潔性)’이라는 순수혈통주의에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려는 숨겨진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코쿠’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그렇거니와(감히 한국시에서 일본어라니!), 이 시집은 등장인물과 시적 에피소드를 외국의 외전(外傳) 형식을 통해 구축했으며, 때로 외국시의 의사(擬似)번역을 통해 한국어 문장의 의도적 교란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는 모국어적 감수성에 타자성을 도입함으로써 ‘모국어’라는 완강한 영토에 파열을 내고, 그 가능성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매우 불순한 ‘번역 실험’(황현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하여 2007년 가을, 그의 두 번째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진행형인 이 ‘사건’의 행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는 일이며, 상당한 개성차에도 불구하고 근원적 차원에서 동시대적인 연대성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던 그의 ‘동료들(?)’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황병승의 두 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은 역시 첫 시집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첫 시집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빛깔을 띠고 있는 이 염세적인 시들은, 여전히 시와 비시(非詩)의 경계에서 모종의 충돌을 일으키며, 전래의 미학적 ‘정전’ 내부/경계에서 “mother fucker!”의 파열음을 내며 폭발한다. 이 시집의 언술들은 대단원의 품을 향해 달려가는 완결된 플롯도 없으며, 정형화된 오선지에 옮길 수 있는 율격의 장치를 갖추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이 시들은 종래의 매끄러운 미학적 형상 고갱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정치적 보수주의에 펑크적 에너지로 맞서다 자폭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마주해야 하는 것은 시행과 시행 사이를 질주하는 이 지독한 폐허의 에너지이고, 정형화된 ‘의미’로 수렴될 수도 가두어 둘 수도 없는 저 발산적 파토스(pathos, 정서)의 흐름이며, 거기에서 산란되고 촉발되는 ‘상식’을 무너뜨리는 다양한 의문의 파편들과 시적 에피파니(epiphany, 顯現)일 뿐 시인의 어떤 전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황병승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독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위협적으로 요동치고 산포되는 어떤 ‘전투’와 맞닥뜨리는 체험이라고 해야 옳다. 나는 이를 ‘시’라기보다는 ‘시적인 것’과 마주하는 매우 드문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시구 하나만은 기억하자. 첫 시집을 능가하는 이 지독한 산문적 에너지, 마약냄새 가득한 이 싸이키델릭한 절망의 ‘트랙’에서도 “우리들이 도망치듯 찾아 헤매는 것은/ 굴 속의 사람들/ 굴 속의 노래/ 음악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아름다운 센텐스”(「눈보라 속을 날아서(하)」), 즉 ‘들판의 별’이라는 사실.

2007년 가을, 다시 두 번째 이야기를 탈고하여 우리를 찾아온 또 다른 작가는 김애란이다. 연령으로 치자면 우리 문단의 가장 막내라고 할 이 ‘어린’ 소설가의 등장은, 어떻게 보면 황병승의 등장과는 반대적 의미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1980년생 김애란의 첫 소설집 『달려라 아비』의 제목은 ‘상큼한’ 것이었지만, 사실 이 소설의 문제의식은 근대소설의 전통적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으며, 그 소설쓰기의 형식조차도 그랬다. 황병승에게서 ‘시적인 것’이 이전 세대의 총체적 에토스(ethos, 관습)나 상징계 질서와 대립ㆍ투쟁하면서 솟아오르는 반(反)휴머니즘적이기도 한 것이었다면, 김애란에게서 소설이란 오히려 가족(세대)과 자본주의적 삶에서 비롯되는 ‘소외’의 문제를, 비판과 연민 때로는 특유의 낙천성을 통해 ‘지양’하려는 ‘휴머니즘’의 소산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첫 소설집은 주제나 작가적 정서, 스타일 면에서 ‘휴머니즘-리얼리즘’을 본령으로 한 근대소설의 계보 내에 위치한 것이었으며, 역설적으로 말해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희귀해지기까지 한 이 텍스트의 ‘진지한’ 존재방식이 이 소설에 ‘신선하다’는 평단의 찬사를 부여하게끔 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늙은 신세대’ 김애란의 스타일이야말로 황병승의 첫 시집이 ‘마니아’와 ‘비토세력’으로 뚜렷하게 나뉘어졌던 것과는 달리, 이 소설가를 평단과 대중독자층 모두에게 사랑 받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성공시대’로 이끈 비결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황병승의 두 번째 시집이 그러한 것처럼, 김애란의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 역시 자신의 첫 소설집의 특징을 더욱 확실히 밀어붙이려는 의지의 소산이라는 점은 같아 보인다.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이 빚보증을 서다 망한 가족, 재수생, 취직자리를 찾아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는 학원강사나 알바생, 한 뺨의 자기 방이 없어 사랑을 속삭일 공간을 찾아 도시 변두리 모텔을 찾아 헤메는 가난한 연인들이라는 것은, 이 소설이 지닌 ‘전통적’ 주제의식이나 글쓰기 방식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2000년대의 젊은 소설가들에게 더 이상 소설적 흥미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이 남루한 소재들을 더욱 정공법으로 다루면서, 김애란은 2000년대의 삶이 여전히 경제적 차원의 빛과 그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무력한 세계이며, 실존적 차원의 ‘고독’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형이하학적 차원에서 비롯되는 ‘자본주의적 소외’의 그늘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2000년대 젊은이들에게 드리운 삶의 소외를 ‘97년 체제(IMF 이후 한국사회의 구조변동)’에서 결정적으로 비롯된 트라우마라고 이해하는 김애란에게, 개인의 삶은 사회구조 바깥에서 외따로 존재하기 힘든 것이며, 소설 역시 시대적 삶의 제약을 벗어나 제 자신의 자율적인 미학의 장 안에 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의 2000년대 버전인 것처럼 보이는 이 소설들의 전형적인 아이러니 기법은, 이 작가가 스스로를 문학사의 어떤 계보학적 지평 속에 위치시키려고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반지하 월세방에서 주인 눈치 때문에 칠 수 없었던 피아노를 셋방이 빗물에 잠기는 상황 속에서나 치게 되는 장면에서, 혹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엄마가 준 껌을 씹으면서 입에 ‘달콤한 침’이 고이는 장면에서, 작가는 재수시절의 노량진역처럼 그저 ‘지나가는 곳’인 줄로만 알았던 생의 간난신고가 우리 시대의 여전한 진행형이며 본질이라는 점을, 아이러니적으로 ‘전망’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 문학평론가 함돈균씨

함돈균 (문학평론가)
200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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