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항균 교수 (인문대 독어독문학과)

얼마 전 이회창씨가 대선출마를 선언하면서 정치권에 일대 혼란을 가져왔다. 그는 위선과 부패로 가득 찬 가짜 보수정당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진정한 보수 세력의 대변자로 내세웠다. 또 얼마 전 『대학신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울대 학생의 40.5%가 자신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내면, 아마도 이 글의 독자는 내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보수 세력을 비판하거나 진보의 기수여야 할 대학생들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가 위의 두 예와 관련해 우려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일반시민들의 정치적인 보수화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개인의 정치적인 의식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고까지도 좌파와 우파라는 이분법에 따라 규정하는 획일적인 사고방식이다. 학생들에게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를 묻는 질문이나 그러한 획일화된 척도에 따라 자신을 규정해야만 하는 학생들을 보면, 앞으로 남은 선거에서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한 후보를 선택해야만 하는 유권자들이 연상되어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왜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만 선택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적인 척도에 따라 사고하고 판단해야만 하는가? 우리의 개인적인 사고체계와 정치적인 신념은 이와 같은 하나의 척도에 따라 기계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불행히도 좌파인가 우파인가를 묻는 질문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만 제기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분류법과 가장 거리가 먼 듯 보이는 문학의 영역도 결코 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어떤 비평가가 한 작가를 우파작가로 분류하면, ‘좌파적인 성향’의 독자는 그 책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어버려 그 책을 들춰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독일의 작가 마르틴 발저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던 초기의 토마스 만과 민주주의에 찬성하던 이후의 토마스 만 사이에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진정한 토마스 만은 좌파와 우파 간의 정치적인 구분을 넘어설 때 비로소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발저 자신도 우파에서 좌파로 ‘변절’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주장처럼 ‘그는 변하지 않았으며’, 예전이나 지금이나 좌파인 동시에 우파이기도 하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더 이상 단순하게 규정될 수 있는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하나의 사태를 둘러싸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자신의 입장을 바꿀 수 있고, 하나의 사태에 대해 상이한, 때로는 심지어 모순되는 관점들을 동시에 제시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이것이냐 저것이냐’ 사이에서 더 이상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고, 모순과 배리(背理)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생산적으로 발전시킬 때 우리는 획일화된 이념의 인간에서 복합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념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자신과 이념이 전혀 다른 사람의 생각을 포용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관용은 이념의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에 도달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또 관용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성의 거울이 될 수도 있다. 갈등과 대립으로 가득 찬 우리사회에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관용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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