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진

1. 88만원 세대와 고시원
한국문학에서 ‘빈곤’이라는 소재와 주제는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것은 가난이 우리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면서도 시대마다 다르게 정의되고 수용되는 역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역사에서 가난을 상징하는 ‘장소’ 역시 매번 다르게 등장했는데, 거칠게 말해서 전후세대의 가난이 ‘셋방’살이조차 바랄 수 없는 숙명적이고 보편적인 가난이었다면, 유신세대의 가난은 경제개발열풍에서 소외된 가난으로 호남의 ‘농촌’과 대도시의 ‘슬럼가’에서 드러났다고 할 수 있고, 또 그 이후부터 9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는 중산층의 보금자리로 자리매김한 ‘아파트’에 밀려 달동네로 쫓겨나고, 또 88올림픽과 도시미화계획으로 세계슬럼사에서 악명높은 기록1)을 세우며 강제퇴거된 도시빈민들의 가난이 무자비한 국가 폭력의 결과이자 노동자 계급의 문제라는 성격을 띠고 드러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2000년대의 문학에서는 어떠한 가난의 모습이 발견되는가? 97년 IMF위기 이후 문학은 꾸준히 중산층의 몰락과 서민들의 황폐화된 삶을 조명해왔지만 최근에는 특히 젊은층의 빈곤을 다루는 작가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한심한’ 청춘들의 좌절과 환상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줌으로써 많은 젊은 독자들을 얻은 작가 박민규와 등단시의 재기발랄함 대신에 두 번째 소설집 『침이 고인다』에서는 평범한 청춘들의 희망과 아픔을 리얼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로 쓰다듬는 문학세계를 보여준 김애란을 꼽을 수 있겠다. 또한 언제나 새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소위 ‘신세대 작가’ 김영하의 최신작 『퀴즈쇼』도 하나의 ‘사회적 문제’라고 할 수 있는 20대 백수, 아니 ‘88만원 세대’가 무자비한 승자독식게임을 본질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착취되고 상처받는가 혹은 어떻게 여기에서 탈출하고 이를 극복하는가를 그려냄으로써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청년 실업’과 ‘청년 빈곤’의 문제에 획기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새로운 책이 등장하여 이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넓혀 나가고 있는데, 그 책은 바로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이다. 이 책은 지금 20대가 겪고 있는 빈곤이 IMF위기 이후 10년 동안 두 정권이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 즉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비정규직화의 결과로서 가해진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문제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현 20대는 정년과 고임금을 보장하는 괜찮은 직업을 잡은 몇몇의 행운아들을 제외하고는 95%가 비정규직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그나마도 지금은 20대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 119만원의 74%의 수준, 즉 88만원으로 먹고 살아야 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2) 이러한 비극은 대부분의 일자리가 몰려 있는 서울의 집값이 살인적으로 높다는 사실에 명품과 사치재가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문화’가 되어버린 현실이 더해져 가중된다. 우석훈과 박권일은 이러한 ‘88만원 세대’의 비참한 현실이 한국 사회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정의인 ‘세대 간 정의’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윗세대, 특히 386세대야말로 20대를 부의 분배에서 배제하고 비정규직과 저가임금으로 착취한 주범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가족 단위로 부가 공유되고 이전되는 한국 사회에서 20대만을 특정한 소외집단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 20대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되면 지금의 20대가 처한 어려움이 언제나 있어왔던 ‘돈은 없었지만 낭만은 있었던 청춘’의 투정이 아니라 ‘돈도 없고 낭만도 없던 저주받은 세대’의 단말마적 비명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의 20대 백수와 알바족들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듯 게으르고 의지가 없어서 또는 사회생활을 싫어하는 오타쿠적인 족속이어서 혹은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직장살이가 몸에 맞지 않는 ‘호모 루덴스’라서 아니면 돈 몇 푼 정도는 쿨하게 무시해 줄 수 있는 ‘N세대’여서 ‘놀고 먹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삶은 생각보다 더 초라하고 남루하다. 그리고 이러한 88만원 세대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고시원’이다. 이전에 고시원은 그렇게 비루한 어감을 풍기지는 않았다. 물론 한국사회에 절대가난이 지배하던 시대에 ‘고시원’ 정도는 그렇게 거주지의 막장은 아니었고, 그곳은 또한 청운의 꿈을 품고 개천에서 올라온 젊은 기상이 용이 되기 위해 잠시 머무르던 곳쯤으로 여겨졌기에 가난하기는 했을지언정 비참한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현재 2000년대 중반, 고시원은 한국의 슬럼인구 1400만3)이 몸을 눕힐 수 있는 가장 값싼 장소 중의 하나이면서도 공무원시험 광풍의 특수를 타고 지방의 취업준비생들을 집어 삼키고 있는 개미굴 같은 곳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시원에는 ‘셋방’, ‘쪽방’, ‘컨테이너 하우스’, ‘반지하’, ‘옥탑방’ 등과 같은 슬럼형 주거 공간과는 또 다른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고시원은 폐쇄적 부의 상징이자, 슬럼으로 뒤덮인 서울 한복판에 “도금된 새장”4)으로서 솟아 있는 복합주상아파트와 함께 한국 사회의 이천년대를 상징하는 비극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한국 문학에서는 이러한 고시원의 ‘몰락’(?)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여럿 발견된다. 앞서 언급한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와 김애란의 「기도」(『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그리고 김영하의 장편 『퀴즈쇼』(문학동네, 2007)가 바로 그러한 작품들이다.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1991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88만원 세대’의 특수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역시 20대의 빈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두 작품과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 탈역사화된 밀실 - 박민규의 「갑을고시원체류기」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고시원으로서는 조금은 “쑥쓰럽고 애매”5)했던 시기, 즉 “일용직 노무자들이나 유흥업소의 종업원들이 갓 고시원을 숙소로 쓰기 시작한 무렵이자, 그런 고시원에서 아직도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남아 있던 마지막 시기”(278)라는 1991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박민규의 고시원은 이렇게 특정한 시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역사화된 공간으로 드러난다. 즉, 고시원이 어떤 특정한 역사적인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실존적 공간인 ‘밀실’로 일반화, 추상화되는 것이다.
서술자 ‘나’는 삼촌이 빚보증을 잘못 서서 집안이 거리에 나앉게 되자, 차압을 피해 잘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막노동으로 입에 풀칠을 하던 형에게 돈을 빌려, 보증금도 받지 않는 이 ‘갑을고시원’으로 들어오게 된다. 무지하게 좁고 창이 없다는 점에서 “관(棺)”(280)과 갑을을 가리기 어려운 갑을고시원은 죽음의 공간으로 웅크리고 있다. 실제로 이곳은 공사판에서 추락사한 형이 마지막으로 거하는 곳인 납골함과도 유사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그곳은 빛이 들어오지 않으며, 그곳에서 인간은 오직 잠만 잘 수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인간은 조용히 석화(石化)된다.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움직이는 행동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중엔 결국 움직임 자체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다리를 뻗을 수 없으니 늘 어딘가가 뭉쳐 있는 느낌이고, 몸은 점점 나무처럼 딱딱해져간다. 마치 가구(家具)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늘 그 자리에 붙박이인 오래된 가구처럼 말이다. (292)

결국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인가 저절로 그런 능력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게 생활화되었고, 코를 푸는 게 아니라 눌러서 조용히 짜는 습관이 생겼으며, 가스를 배출할 땐 옆으로 돌아누운 다음 -손으로 둔부의 한쪽을 힘껏 잡아당겨,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285)

인간의 최소한의 움직임도 고려하지 않는 이 구조에서 인간은 기본적인 생리적인 욕구조차도 ‘소리소문 없이’ 해결할 수 있도록 체질 전환된다. 인간의 몸에 맞추어 공간이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공간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공간은 한 톨만큼의 인간적인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 곳인데, 바로 이 공간을 그렇게 통제하고 있는 자가 갑을고시원의 유일한 ‘진짜’ 고시생 ‘김검사’이다. 그는 고시원의 기표와 기의의 위태로운 분리를 제 몸으로 고정시키고 있기에 그의 법은 곧 고시원의 법이 된다. 그는 고시원 전체에 ‘정숙’을 강요하고 ‘냉기’를 불어넣었다. 그가 나타나면 모든 사람들이 말이 없어지고, 웃음을 멈춘다. 물론 여자들은 가끔씩 그 법을 무시했으나 서술자 ‘나’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은 그 법에 철저히 복종한다. 비록 김검사가 ‘나’의 법적 자문에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291)라는 일반상식적인 조언을 함으로써 현실의 법에는 완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잠깐 드러냈지만, 갑을고시원에서만큼은 그는 ‘아버지’의 법으로 군림한다.
그러나 ‘나’는 이 갑을고시원의 ‘아버지’의 붕괴를 우연히 목도하는데, 실연을 당한 김검사가 자신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 좁고 메마른 고시원 한 관(棺)에서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무너지기 직전의 거대한 댐을 자신의 몸으로 막고 있었다는 네덜란드 소년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인간으로 살 수 있었던 이 모순의 공간에서 이 모순의 원리를 힘겹게 지탱하고 있던 김검사가 무너져 내리자, ‘나’는 ‘고독’해지는데, 이 고독은 “인간도, 결국은 밀실에서 살아간다”(298), “인간도, 결국은 밀실에서 죽어간다”(298)라는 실존적 인식으로 추상화된다.

1센티미터 두께의 베니어로 나뉜 칸칸마다 빼곡히 남자나 여자들이 들어차 있다. 그 속에서 다들 소리를 죽여가며 방귀를 뀌고, 잠을 자고, 생각을 하고, 자위를 한다. 살아간다. 생각할수록 그것은 하나의 장관이다. 뭔가 통해 있고, 비릿하고, 술렁이는 느낌이다. (293)

여기에서 고시원은 최악의 주거 형태라기보다는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으로 제시된다. 세상을 잘 모르던 순진한 대학생은 엉겁결에 이 ‘밀실’에 들어와 ‘살아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배우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287)와 같이 고시원 체류 동안에 얻은 수많은 ‘진리’들은 박민규의 고시원이 인생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제공해주는 방법론인 ‘헤르메노이틱(Herme-neutik, 해석학)’ 으로서의 헤르메틱(hermetic, 밀실같은)한 공간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후 취직을 하고 결혼도 하여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몸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밀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서술자는 그 갑을고시원에 일종의 향수까지 품고 있다.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 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303-4)

박민규의 고시원은 비인간적인 사회 그 자체의 축소판이면서도, 사회에서 소외받고 상처받은 인간을 보듬어주는 안식처 같은 곳으로서 두 개의 모순적인 의미층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작품 속에서 첨예한 긴장을 일으킨다기보다는 고시원이 무덤tomb이면서 동시에 자궁womb으로, 에로스, 또는 생기vitality가 제거된 공간으로서 몽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기운을 물씬 풍긴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박민규 특유의 유머러스한 묘사를 통해 비극적인 상황인데도 독자들의 웃음보를 자극하는 치밀하게 고안된 문체가 주는 그로테스크한 효과로 인해 가려져 있다. 박민규의 여타 소설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러한 수법은 마이너한 감성을 지닌 독자들을 토닥토닥 위로해줄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현실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저항’ 그 자체가 촌스러워진 시대 속에서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그의 다른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인 환상으로 현실을 가로지르는 기법과 함께 보아야만 정당하게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3. 서울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넘어서 - 김애란의 「기도」
박민규의 고시원이 탈역사화된 공간으로서 발견되는 것과는 달리 김애란의 「기도」에서 ‘고시원’과 ‘고시촌’은 현재 신자유주의 시대에 20대 대졸자가 처한 남루한 현실을, 나아가서는 서울의 남루한 현실을 조명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인물, 즉 서술자 ‘나’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50대 중반의 노동부 “알바생”6)은 모두 현재 한국사회에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흔하디흔한 소시민들이다. 먼저 ‘나’는 지방에서 자라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불안한 마음에 쫓기듯이 들어가긴 했지만 어느 화장품 회사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스펙’은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나’는 일이 잘못돼 회사를 일 년 만에 그만둬야 했고, 지금은 번역아르바이트나 과외로 그럭저럭 생계와 품위는 유지할 수 있는 정도로 살고 있다.
이에 비해 ‘나’의 언니는 그야말로 ‘88만원 세대’의 전형의 삶을 살았는데, 지방에서 수학과를 나와 처음에는 임용고시를 그 다음에는 교육행정직 시험을 준비하면서 꽃다운 20대를 독서실과 도서관 “칸막이 안”(190)에서 보내버린 ‘가련한’ 청춘이다. 게다가 그녀는 몇 년 동안 이 가망 없는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느라 자신에게 어떠한 쾌락도 나태함도 허락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렇다.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생리통이 오거나 몸살을 앓을 때도”(189) “첫차를 타고 독서실에 가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189) 그뿐만 아니라 어느 고시생이 조금 집적거렸다고 바로 가차 없이 독서실을 바꿔버리는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단칼에 스스로 거세시켜 버리는 단호한 면모를 보이지만, 사실은 서툰 학생이 자리를 가리듯, 공부하기 좋은 곳을 찾아 이곳 저곳을 떠돌며 신림동 고시촌까지 흘러들어온 일종의 ‘고시 낭인’에 불과하다.
김애란과 박민규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누가 왜 요즘 세대를 ‘쿨하다’고 정의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박민규의 청년들이 다들 조금은 수줍고 둔하고, 한심하지만 착한 얼치기에 왕따 스타일이라면, 김애란의 소녀들 역시 『침이 고인다』에서만큼은 신경숙의 그녀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좀 청승맞고 따뜻하며, 어리숙하고 착한 자매들이다. 드라마나 광고에서 ‘쿨하고’, ‘화려하고’, ‘럭셔리하게’ 등장하는 88만원 세대는 그러나 실상은 ‘쿨하게’ 수업을 제끼지 못하고 학점을 위해 전출을 불사하며, 면접에서 서른 번쯤 떨어지고 나서 “정말 나는 괴물이 아닐까”7)라고 고뇌하는 족속들이다. 「기도」에서 ‘언니’는 책값을 아끼겠다면서 인터넷에서 약도도 뽑아가지고 위풍당당 서울대 근처의 헌책방을 뒤지지만, “불현듯, 그리고 부끄럽게 서울대학교 근처 헌책방에서는 9급 공무원 책을 팔지 않는다는 것”(193)을 깨닫는다. 이에 잔뜩 민망해진 그녀는 이를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위해서 ‘이탈리아 음식점’에 들어가 ‘스파게티’를 시키는데, 결국 본래의 목적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다는 기분에 그녀와 동생은 모두 씁쓸해진다. 여기에서 소비는 결코 즐거운 일로 그려지지 않는다. 모든 브랜드 제품의 적확한 쓰임새를 체화하고 있던 하루키 세대와는 달리 그들은 자신들의 초라함과 촌스러움을 보상받기 위해서 소비를 하지만 이를 전혀 보상받지 못한다. 예컨대 김애란의 단편 「성탄특선」(『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은 이러한 소비심리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두 젊은 연인은 크리스마스를 특별하게 보내기 위해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예약했지만 지루했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지만 30분도 넘게 기다려야 했으며, 서투르게 주문해서 음식도 남기고 7만원을 내야 한데다가, 음식은 “겨드랑이 암내 비슷한 향신료”8)가 나서 비위에 거슬려 아무것도 제대로 즐긴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남들처럼 “뭔가 하고 있다”9)라는 느낌에 만족해하는 것이다. 이들의 비극적인 소비는 「기도」에서 두 자매가 소고기를 더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연구팀이 인증한 인진쑥을 먹여 키운 돼지”(195)라는 문구에 현혹되어 식당에 들어갈 때도 계속된다.
이러한 현혹과 기만의 메커니즘은 ‘서울’이라는 도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서술자 ‘나’는 부유하고 화려할 것 같은 서울이 사실은 난개발과 슬럼가로 엉성하게 기운 누더기 같다는 것을 눈앞에서 보게 되면서 “수도가 이래도 되나?”(203)라고 재차 묻는다. 그녀에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라는 실체는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풍문”(195)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김애란의 소녀들은 대도시의 달콤하고 현란한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에 포획되지 않는다. 그들이 대부분 숨을 헉헉대며 올라갈 수밖에 없는 달동네나 산동네, 또는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지저분해 보이는 셋방과 고시원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이 판타스마고리아에 포획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서울의 그것은 19세기 파리와는 달리 너무나 빈약하게 작동한다. 그래서 그녀들은 자신들만의 환상과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비록 그것이 보잘 것 없고, 금방 부서질지라도.

신림- 하면 푸른 숲이 떠오른다. 나무가 많은 숲 그리고 젊은 숲. 그 숲의 나무들은 모두 지하철 2호선을 표시하는 연녹색을 띠고 있다. 보통의 나뭇잎은 그보다 짙지만 어쩐지 신림의 나무들만은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신림, 하고 소리 내면, 먼 곳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흔들리며 ‘수풀 림, 수풀 림’하고 울어대는 것 같다. 신림, 하고 발음할 때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 (183)

신림동에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누구나 신림이 푸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상에 계속 물을 주고 볕을 쬐인다. 예컨대 ‘언니’는 고시원에 딸린 조그마한 ‘정원’에 반해서 이 고시원에 이사를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정원이란 것이 사실은 인조 잔디 위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제비꽃이 몇 송이 솟아 있는 손바닥만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그마한 공간을 ‘정원’이라 부르고 거기에 이미지를 덧씌우지 않으면 그들은 이 고시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고시원은 “어떤 소중한 가짜”(204), 즉 환상 한 뙈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1층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니 게시판에 붙은 포스트 잇이 보인다.
- 통행 시 반드시 뒤꿈치를 들고 다닙시다. 주인백.
그리고 또 한 장이 보인다.
- 제 지갑 가져가신 분, 죽어버리세요.
언니의 방은 3층 복도 끝에 있다. 수십 개의 똑같은 문이 잔혹 동화처럼 펼쳐져 있다. (200)

그러나 김애란의 고시원은 ‘잔혹 동화’의 배경이 되기에도 너무나 초라하고 안쓰럽다. 책걸상이 유일한 가구인 작은 방은 바닥이 차고, 외풍을 막기 위해 문에는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오히려 소년소녀 가장 수기에나 어울릴 것 같은 공간이다. 따라서 그녀들이 이 현실에 덮어씌우는 환상이란 고시원의 어느 방 문고리에 덧씌워진 분홍자수가 놓인 “흰색 보자기”(200)처럼 얄팍하고, 나풀거리며, 순진하다. 그렇기에 이들의 현실이 더욱 암담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꿈도 남루하게 꾸는 것이다. 김애란이 그려내는 현실은 김영하의 『퀴즈쇼』가 그려내는 현실처럼 가시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사람들을 조금 부끄럽고, 초라하며, 메마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앙상하게 드러내는 곳이 바로 고시원이다. 즉, 이렇게 궁핍하고, 퇴락하고, 초라한 고시원의 풍경은 발랄하기만 한 'Hi Seoul'의 쓸쓸한 진실인 것이다.

4. 고시원의 바깥은 없다 - 김영하의 『퀴즈쇼』
우리가 2000년대 한국의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88만원 세대의 수업시대’를 새로 쓴다면 우리의 ‘빌헬름’은 고시원을 거쳐야 할 것이다. 세상을 배우기 위해서 자의든 타의든 일단 집을 나온 무일푼의 젊은이를 받아주는 곳은 보증금도 받지 않는 고시원이 현재로서는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영하의 『퀴즈쇼』에서도 전 재산을 빼앗겨 버린 20대 백수이자 사고무친 천애고아인 이민수에게도 ‘고시원’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고시원은 한국사회의 무자비한 승자독식게임의 ‘루저’들을 모아놓은 수용소이면서 동시에 그 ‘루저’들끼리 “서로를 야금야금 파먹으며”10) 살아가고 있는 개미굴이다. 세상물정을 모르며 “지식이라는 딱딱한 껍데기 속에 웅크리고 있는”(251) “달팽이”(251) 같은 주인공 ‘나’는 현실주의자에게 “뼛속 깊이 게으름이 배어 있다”(78)는 비난을 듣고 사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루저’다. 그는 무일푼일 뿐만 아니라,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어”(77)하기 때문에, 즉 진정한 ‘자본주의적 마인드’가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루저’이다. 그는 대학원까지 나온 허우대 멀쩡한 20대 대한민국 남성이지만 현재 백수로 지내고 있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도 대학을 졸업할 무렵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남들이 하는 대로 이것저것 노력도 해보았으나 사회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액션 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평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 [...] 우리 부모 세대는 그 중에서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193)

사실 어른들은 우리 세대가 책도 안 읽고 무능하며 컴퓨터 게임만 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건 완전히 착각이다. 정작 책도 안 읽고 무능하고 외국어도 못하면서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사람들은 그날 면접장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던 면접관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193)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 김영하의 『퀴즈쇼』는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의 소설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88만원 세대’의 답답한 현실과, ‘세대간 불평등’의 불가해한 구도를 놀라우리만큼 기민하게 포착하고 있다. 작가가 스스로 “이십대 혹은 이십대적 삶에 대한 내 연민”11)이 『퀴즈쇼』를 쓰게 된 최초의 동기라고 밝혔듯이, 이 소설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20대의 생산(편의점 알바)과 소비(코엑스, 커피빈, 홍대앞)의 양상 및 핸드폰과 인터넷으로 인해 질적으로 바뀌어버린 젊은 세대의 생활양식과 멘탈리티 등을 치밀하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2000년대 이후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실감나게 전달해주는 ‘시대소설Zeitroman’이다. ‘신용불량’, ‘파산’, ‘인터넷’, ‘핸드폰’ ‘퀴즈쇼’, ‘지식in', ‘고시원’, ‘편의점’, ‘코엑스’, ‘커피빈’, ‘홍대앞’ 등 우리 시대를 보여주는 수많은 기호와 장소들은 김영하의 『퀴즈쇼』 안에 모여서 한국사회라는 거대한 ‘퍼즐’을 형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를 그리고 있다: ‘도대체 우리 사회란 무엇인가?’
평론가 복도훈의 해설처럼 김영하의 『퀴즈쇼』를 하나의 ‘성장소설Bildungs-roman’이라는 개념으로 읽을 수 있다면12)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성장소설을 어떤 단순하고 평범한 청년이 처음에는 사회와 대립하다가,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가르침을 얻으며 자아의 성숙에 이르고, 사회와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시민 혹은 ‘사회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이라고 이해한다면, 김영하의 『퀴즈쇼』는 이러한 성숙의 가능성 혹은 유의미성을 거부함으로써 성장소설의 하나의 판본version이자 도착perversion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회’란 것이 『퀴즈쇼』에서는 ‘회사’이고13) ‘고시원’이며, ‘편의점’인데, 이 모든 공간들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이름이든, 약육강식의 원리이든 간에 개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필요 없을 때는 가차 없이 추방시키는 ‘폭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의 본질은 퀴즈쇼의 승부욕 강한 검투사 ‘탱고’가 “정상적으로 신호를 받아 좌회전을 하는 오토바이를 그대로 밀어”(335)버리자 이것을 본 선배가 증권회사에 들어가라고 권했다는 데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 사회란 남을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 버리는 자가 살아남는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성장소설에서 개인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장소들을 거치면서 ‘성숙’해가지만 김영하의 개인들은 ‘악랄’해져 갈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기 위해 『퀴즈쇼』의 이민수는 계속 ‘사회’로부터 도망치는지도 모른다. 그가 불가해하게도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단 한군데 ‘회사’에도 입사하지 못했을 때, 면접관들은 그에게 말한다. “바로 그거예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요. 그런데 그게 언제나 가장 중요하단 말이에요. [...] 사회는 그런 거예요.”(191) 결국 그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망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최대한 사회와 멀리 떨어져 쓸모없는 책들만 읽으며 자신의 교양Bildung만 쌓아간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할머니의 빚 때문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편의점에서 알바를 시작하는데, 이 ‘편의점’이란 곳이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얼굴이다. 편의점의 점주 역시 ‘관행’이라는 이유로 그렇지 않아도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어린 알바생들의 “쉰 시간치의 급여를 보증금 조로 잡아두고”(108) 있으며, 이 알바생들의 점심으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주면서 “세상은 학교가 아니야”(100)라던 자신의 훈계를 몸소 실천한다. 결국 이러한 세계에서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다시 고시원에 틀어박힌다. 여기에서도 ‘고시원’이 다시 한 번 2000년대 ‘사회부적응자’들의 무대로 부상한 것이다. 그는 고시원에 붙어 있는 다윈의 경구 “가장 강한 자가 아니라 환경에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93)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존경하는 찰스 다윈 선생님. 말해주세요. 저는 이 세계의 적자일까요? [...] “이런 나는 이 세계의 강자도 아니고 적자도 아니었잖아? 그럼 여러분, 이만 안녕!” 이러면서 퇴장하면 되는 건가요? [...] 인생이라는 게 패자부활전도 없는 그런 잔혹한, 만인 대 만인의 투쟁하는 냉정한 게임인가요? [...] 내가 이 세계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겠니?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 말 같은 말을 하고, 집 같은 집에서 잠들고, 밥 같은 밥을 먹으며 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 (93-4)

김영하의 『퀴즈쇼』는 한국사회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과 환경에 잘 적응하여 ‘사회인이 된다는 것’의 양자가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사회로의 입사’를 거부하는 ‘사회부적응자의 윤리’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나’는 ‘성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다른, 더 가혹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부적응자’들이 모여 있기에 나름의 ‘윤리’가 싹틀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고시원에서 벌어진다. 실제로 주인공은 또 다른 88만원 세대의 가련한 청춘, “새벽에 일어나 공무원 시험 전문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전 열한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대형 마트에서 포장 일을 하고, 그 일이 끝나면 고시원에 돌아와 아침에 학원에서 공부한 것을 복습하다가 잠든다”(124)는 ‘옆방녀’를 우연한 기회에 도와주게 되고, 고시원 옥상에서 함께 삼겹살을 구워먹으면서 처음으로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나’의 알맹이 없는 박학다식함과 허황된 인생관을 처음으로 진심으로 부끄럽게 만들었고, ‘나’는 그녀의 외롭고 고단한 서울살이에 잠시나마 친구가 되어준다.
김영하가 그리는 고시원은 남루하고 피로한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데서 김애란과 맥을 같이 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김애란이 ‘작은 보금자리’를 둘러싼 젊고 가난한 소녀들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섬세한 문장으로 곱게 빚어내었다면, 김영하는 그보다는 고시원을 젊은 세대들의 꿈의 세계이자 무한한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세계로 설정함으로써 절망적인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불행하게도 ‘깃발고시원’에는 창이 없다. 그 방의 유일한 창은 현실의 창이 아니라 “빌 게이츠의 창,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62)이다. 그 창을 통해 ‘나’는 ‘롱맨’이라는 아이디로 자신의 잡다한 상식과 지식을 뽐내고, 환상을 연기하면서 현실의 빈한함을 잊는다. 그러나 그 창이 닫히면 그는 한갓 ‘wrong man’, 즉 ‘잘못된 인간’일 뿐이다. 고시원은 포스트모던한 한국사회에서 매트릭스의 ‘인공자궁’처럼 끝없는 ‘시뮬라크르’들만을 흡수하는 조그마한 ‘블랙홀’이다. 그곳은 어떠한 실재도 생산되거나 작동하지 않는 공간, ‘철저한 허무의 공간’이다. 그래서 ‘고시원’은 “노트북 십이 인치 액정화면보다 작아”(93) 보인다. 그 곳은 생명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사용”(282)되는 곳이며, 어떠한 낙관적 희망도 잉태될 수 없는 절망의 공간이다. 그래서 ‘옆방녀’는 목을 맨다.
가난한 “촌년”(122) ‘옆방녀’에게 돈 20만원을 빌려서 요정나라의 공주님처럼 부유한 사장님 집에 갇혀 살았다는 ‘벽 속의 요정’과 꿈만 같은 데이트를 했던 날 밤, 그 ‘옆방녀’가 자살했다는 이 조금은 도식적인 멜로드라마적 구조는 주인공을 다시 한번 이 사회로부터 도망치게 만든다. ‘깃발고시원’도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고시원 주인은 ‘나’가 고시원비를 제때 내지 못하자 말도 없이 바로 방을 빼고는 다른 사람을 받은 뒤 짐짓 모른 척한다. 그리고는 ‘나’에게 ‘옆방녀’가 죽어서 비게 된 방에 들어가지 않겠냐고 뻔뻔스럽게 제안한다. 고시원도 철저하게 냉혹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이러한 사회의 또 다른 일부라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퀴즈쇼’라는 일종의 도박게임에 빠져드는데, ‘사회’와는 완전히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회사’ 생활 속에서 승자독식게임의 생리를 빠르게 익혀나가며 철저하게 옛날의 자신을 잊어버린다. 그는 ‘롱맨’이라 불리며 다른 사람 정도는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잘)못된 인간’으로 어느새 변모한 것이다.

유리의 표정은 절절했다. 그러나 유리의 애원은 내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는 잔인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조금 놀랐다. (398)

결국 그는 다른 사람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 자신도 상처를 입은 뒤, 이 사회에서 다시 한번 도망치게 되고, 다음과 같이 깨닫는다. “세상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다는 거. 인간은 변하지 않고 문제는 반복되고 세상은 똑같다는 거야. 거긴 정말 이상한 곳이었는데, 처음에만 그랬을 뿐, 적응하고 나니 하나도 다른 게 없었어.”(426) 여기에서 김영하의 ‘빌헬름’은 자기 집에서, 편의점에서, 고시원에서, ‘회사’에서 매번 도망침으로써 모든 곳이 사회의 다른 정거장이었음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성숙’한 것일까? 아니면 그는 자기 집에서, 편의점에서, 고시원에서 ‘회사’에서 매번 쫓겨남으로써 결국에는 모든 곳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냉소적인 교훈만을 얻은 것일까? 『퀴즈쇼』의 결말은 모호하다. 주인공 이민수의 도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매번 ‘추방’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이 떠나온 혹은 쫓겨난 사회에, ‘회사’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는 갑자기 어른이 된 듯 “이제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을 거야”(430)라고 선언하는 한편, 그 퀴즈쇼를 “한번쯤은 해볼 만해. 허위도 가식도 없이 그냥 자기 운명과 맞장을 뜨는 세계야”(428)라고 회상하고 은근히 그리워하면서 다시 돌아갈 ‘게이트’를 남몰래 찾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88만원 세대의 수업시대’는 고시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비록 ‘나’가 헌책방 ‘어제의 책’의 유순한 직원이 되어 정착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는 “택배상자보다 조금 큰”(189) 어두컴컴한 고시원 방 한 칸 속에서 인터넷으로 ‘퀴즈방’에 접속해 환상 속에서 부유하던 그 시절에서 조금도 더 성장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건강하고 유능한 ‘시민’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김영하의 『퀴즈쇼』는 성장소설Bildungsroman의 도착적 버전perversion이다. 또한 『퀴즈쇼』는 ‘고시원의 바깥은 없다’라는 21세기 한국사회의 무시무시한 현실 속에서 ‘성장소설’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유의미하지도 않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여기’를 말하고자 하는 ‘오늘의 책’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5. 고시원에 갇힌 가엾은 내 청춘을 위하여
앞서 살펴 본 박민규와 김애란의 소설들, 그리고 김영하의 『퀴즈쇼』를 단지 무자비하고 가혹한 한국사회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는 청춘들의 상황을 확인시켜주고 있다는 것으로만 본다면, 김애란의『침이 고인다』를 해설한 이광호의 말대로 “안타까운”14)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안타까운’ 것은 풍부한 함의를 갖고 있는 우리의 2000년대 문학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국사회의 실정을 논의하기 위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시급한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88만원세대’라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공감하고 있는 문제가,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같은 대학가를 휩쓸고 있는 인생지침서나 자기계발서보다는 우리의 젊은 문학에서 좀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유의미한 담론이 생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가난은 현실에서는 비참한 것이지만, 문학에서는 독특한 미학을 성취할 때가 있다. 문학에서도 가난이 단지 재현과 윤리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2000년대 문학에서 빈곤은 가장 남루한 공간 중의 하나인 ‘고시원’에서 그러한 미학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고시원은 ‘옥탑방’이 ‘옥탑방’이고 ‘반지하방’이 ‘반지하방’이며, ‘셋방’이 ‘셋방’인 것과는 달리 ‘고시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묘한 분열의 공간이다. ‘고시원’을 무대로 하는 한국문학이 외국어로 번역된다면,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원’에 일용직 노동자들과 유흥업소 종사자가 들락날락거리는 풍경은 분명히 카프카적인 공간으로 읽힐 것이다. 또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얇은 베니어판 한 장으로 가른 수십 개의 관에서 아는 데도 모른 척 고립된 동거를 하는 모습도 기이한 현대적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함을 제일 기민하게 포착한 작가는 박민규일 것이다. 박민규에 의해 ‘고시원’이라는 공간 자체의 본질적 특성이 드러났다면, ‘2000년대 서울’이라는 시공간이 보다 탄탄하게 뒷받침된 김영하의 고시원은, 88만원세대가 갇힌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탈출구 없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김애란의 고시원은 서울의 희미한 판타스마고리아가 은폐하고 있는 궁핍과 남루의 현실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런데 김애란의 소녀들은 이 현실을 자신들만의 판타지와 감수성으로 놀랄 만큼 가볍게 뛰어 넘어 본다. 그녀들은 이 상상의 도약이 몇 초 후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김애란의 문장들은 ‘88만원 세대’의 감성에 따스한 불을 지피운다. 이러한 2000년대 문학의 새로운 빈한의 풍경은 어느 ‘고시원’에 갇혀 있는 가엾은 청춘을 위한 희망의 노래가 될 수 있을까.

각주
1)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이전에 서울에서 무려 72만명이 한 번에 강제 퇴거되었고, 이것은 그때까지 세계 슬럼 퇴거 사건사에서 유례없는 놀라운 기록으로 남아있다. (마이크 데이비스, 『슬럼, 지구를 뒤덮다』, 김정아 옮김, 2007, 돌베개, 142면 참조.)
2) 우석훈․박권일,『88만원 세대.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2007, 레디앙, 20-21면 참조.
3) 마이크 데이비스, 40면 참조.
4) 마이크 데이비스, 158면.
5) 박민규, 「갑을고시원 체류기」,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278면. (이하 인용 옆에 면수만 표기)
6) 김애란, 「기도」,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209면. (이하 인용 옆에 면수만 표기)
7) 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120면.
8)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97면.
9)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96면.
10) 김영하, 『퀴즈쇼』, 문학동네, 2007, 114면. (이하 인용 옆에 면수만 표기)
11) 김영하, 「작가의 말」, 『퀴즈쇼』, 문학동네, 2007. 462면.
12) 복도훈, 「추방된 젊음, 디오게네스의 윤리」, 김영하, 『퀴즈쇼』, 문학동네, 2007. 447면 참조.
13) 복도훈, 449면 참조.
14) 이광호, 「나만의 방, 그 우주 지리학」,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28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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