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근

「밀양」은 이창동의 전작들과 다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창동의 전작들은 정치적이다. 그의 소설집 『소지』나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보이는 작품들은 한국 정치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진짜 사나이」에서는 1987년 항쟁 과정 속에서, 우매한 민중이 운동가가 되는 과정과 그것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위선적 자화상을 다루고 있다. 「초록물고기」에서는 군 제대 이후 조폭 똘마니가 된 뒤, 두목에게 이용만 당하다 죽는 ‘막둥이’의 삶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드러내고 있다. 「박하사탕」에서는 순수한 청년이 어떤 과정을 거쳐 민주 투사들을 고문하는 경찰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오아시스」에서는 장애인들의 삶을 통해 역시 소외받은 계층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런 그의 전작들에서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캐릭터들을 ‘용천뱅이 캐릭터’라고 명명하고 싶다. 그의 소설 「용천뱅이」에는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매일 술만 먹고 밥만 축내는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후에 아버지는 자신이 간첩이었음을 고백하며 말한다. “(용천뱅이는) 여하튼 성한 사람이나 보통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들이라 할까…….” (중략) “전쟁이 끝나자 갑자기 그 용천뱅이들이 부쩍 늘어났었다. 시골이고 도시고간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용천뱅이들이 떼를 지어 다니곤 했는기라.” 보통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들이 그의 영화 주제의 핵심을 이룬다. 소설에서의 용천뱅이들은 한국전쟁 후 좌익으로 낙인찍힌, 혹은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희생당한 인물이라는 시대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띠었지만, 이창동은 영화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에도 그런 용천뱅이들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의 이 용천뱅이들, 조폭똘마니(막둥이), 전직경찰(영호), 장애인(공주), 전과자(장군)은 그의 소설에서 나오는 정치적이고 시대적인 용천뱅이들과 같이, 자신의 잘못이나 의지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면서도 죄인처럼 천대받고, 냉정한 이 사회에 어울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용천뱅이다.
이창동의 캐릭터들은 항상 길 위에 서있다. 혹은 차 안에 있거나 기차 위에 있다. 「초록물고기」에서 막둥이가 보스의 여자 미애를 처음 만난 곳은 기차 위에서이다. 기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 막둥이에게 그녀의 스카프가 날아온다. 막둥이는 또한 보스의 차를 몰고 다니고, 중요한 대화가 오가는 곳도 차 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역시 미애는 차 안에 들어와 하늘을 보며 울부짖는다. 「박하사탕」에서는 기찻길이 영화의 중요 모티프를 이끌고 간다. 거꾸로 가는 기찻길이 시대와 시대 사이에 삽입되어 관객을 역사의 뒤로 끌고 간다. 「오아시스」의 장군과 공주가 왈츠를 추는 것도 차를 타고 가던 도로 위에서이다. ‘길’이라는 모티프는 이창동에게 항상 영화를 이끄는 힘이다. 관객은 영화 속 용천뱅이들과 함께 그들의 삶의 길을 함께 걷는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이 왜 용천뱅이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깨닫는다.
그러나 「밀양」의 신애는 전작에서 보이던 정치적 용천뱅이 캐릭터에서 벗어나 있다. 그녀는 소외받는 계층이 아니다. 음대 출신의 중산층인 데다가, 신체 건강하고, 예쁜 외모에 귀여운 아들도 있다. 그녀의 고통 역시 남편의 바람이거나, 돈을 목적으로 한 아들의 납치 살인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정치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신애는 ‘척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밀양에 내려오면서부터 ‘아는 척’을 한다. “밀양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비밀 밀 햇볕 양, 비밀의 햇볕이란 뜻이래요.” 김사장이 걸어둔 가짜 상장을 보고, 언제 이런 걸 받았냐고 묻는 동생에게는 “나 피아노 잘 쳤어”라고 ‘피아노 잘 치는 척’을 한다. 통장에 870만원밖에 없으면서 땅 계약하러 다닌다고 소문을 내서 ‘있는 척’을 하고, 죽은 남편이 예전에 바람피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한다. 약국 아주머니에게는 “저 불행하지 않아요”라며 ‘행복한 척’을 한다. 그녀의 이러한 ‘척’은 그녀의 아들 준의 ‘척’과 같다. 아들 준은 아빠가 생각날 때마다 ‘자는 척’을 하고, 엄마가 자기를 찾을 때마다 ‘없는 척’을 한다. 이창동은 신애의 ‘척’들과 준의 ‘척’들을 병기시켜 놓음으로 인해서 결국 두 사람의 ‘척’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청준의 원작 소설 「벌레이야기」와 「밀양」이 다른 것은, 「벌레이야기」에서는 자신이 용서해야 할 사람이 이미 신에 의해 용서받았다는, ‘용서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반면, 「밀양」에서는 아들의 죽음을 은근슬쩍 신애의 잘못으로 떠넘기고 있다는 것이다. 준의 ‘척’은 사실이 된다. 준은 실제로 죽음으로써 (세상에서) 없어지고, (영원히)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을 낳은 원인은 신애의 ‘척’이다. 신애가 부동산 계약하러 다닌답시고 있는 척하지 않았더라면 준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창동이 원작에 없는 내용을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말하자면 신애는 자신의 비극을 자기 스스로 야기한 셈이 되는데, 이창동의 전작에서 보이는 용천뱅이들의 비극적인 삶은 주로 본인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구조의 잘못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신애의 비극을 낳은 ‘척’들도 사실은 그녀의 고통과 상황에서 기인하는 것일지 모른다. 신애는 미용실에서 마을 아줌마들이 자신을 흉 보는 것을 듣게 된다. 그녀는 밀양이란 도시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남편이 없는 과부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약간 정신나간 여자’라는 취급을 받는 것이다. 애초부터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던 그녀가 사람들과 친해지고 또 조금이나마 떳떳하기 위해서는, 온갖 ‘척’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밀양이란 도시 자체가 그녀를 ‘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얼핏 보기에 그녀가 스스로 야기한 듯한 잘못이 사실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것. 이것이 밀양에 숨겨진 비밀일지 모른다.

김사장은 신애에게 자신이 모시는 회장님을 소개시켜주겠다고 한다. 회장님이 밀양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알아두면 좋다고 한다. 그런 김사장에게 신애는 “속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애의 온갖 ‘척’에서 볼 수 있듯이 진짜 속물은 신애다. 신애는 자식을 잃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는데, 신애는 교회에서도 ‘속물 기독교인’이다. 얼핏 보면 신애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착한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모순된 것들이 보인다. 첫 번째는 그녀가 기독교인이 되고 난 뒤에 길을 운전하던 중, 자신의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원장의 딸과 마주칠 때이다. 신애는 말로는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원수의 딸이 구타당하는 것을 못 본 척한다. 두 번째는 그녀가 용서하러 교도소에 간다고 할 때이다. 김사장은 ‘신애에게 굳이 직접 얼굴 보고 용서할 필요가 있느냐’고 따지지만, 신애는 꼭 가야겠다고 한다. 이창동은 원작에 없던 김사장을 넣음으로 인해서, 이리 저리 심적 변화를 겪으며 방황하는 신애의 곁에서 영화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김사장이 말했듯이 ‘마음으로 용서해’도 되는 것을 굳이 직접 찾아간다고 하는 것은, 신애가 또다시 무언가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애가 진심으로 그를 용서했다면, 그의 딸이 맞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신애의 기독교 생활도 ‘척’의 연장이다.

이런 일련의 플롯에서 분명한 것이 있다면, 그녀가 매우 슬퍼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슬픔을 직접적으로 표출시키지 않는다. 이창동의 영화에서 슬픔의 표출은 대개 절제되어 있거나 다른 행동을 통해 표출된다. 즉 대개 눈물 한방울로 보여주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남의 잔치에 추태를 부리는 등의 행동으로 표출된다. 신애 역시 코를 고는 척하며 눈물을 단 한 방울만 흘린다. 그럼에도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며 매우 슬픈 느낌을 받고, 또 신애에게 오롯이 감정이입하게 되는 것은 순전히 이창동의 능력이다. 이창동은 영화의 숏과 숏 사이로 관객을 끊임없이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인물이 어느 장소에 도착하고 카메라는 그 인물의 시점숏으로 전경을 한 번 훑는데,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다가 갑자기 인물의 뒤통수가 나온다. 다시 말해서 인물의 시점숏인 것처럼 카메라를 움직임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한 뒤에, 알고 보면 그저 카메라의 시선이었다고 밝히는 것이다. 이러한 카메라의 움직임은 관객으로 하여금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카메라의 존재를 깨닫게 한다. 더불어 인물의 시점과 카메라의 시점 그리고 관객의 시점을 합쳐버린다. 이 숏을 이창동 특유의 숏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러한 이창동 특유의 숏과 인물의 진짜 시점숏 그리고 인물의 모습을 비추는 숏. 이 세 가지 종류의 숏들이 끊임없이 병치됨으로 인해 관객의 시선은 숏과 숏 사이에 쏙 끼어 들어가게 된다. 이것은 히치콕의 「싸이코(psycho)」(1960)에서 보이는 제3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히치콕은 앞서 언급했듯이, 인물의 모습을 비추는 숏 그리고 인물의 시점 숏 이외에 제3의 시선을 끼워넣음으로써 영화를 ‘봉합’한다. 이후 무수히 많은 영화에서 이 기법을 이용하게 되었고, 이창동 역시 관객의 시선을 중간중간 집어넣음으로써 영화를 ‘봉합’하고 있다. 이런 ‘봉합’의 기법이 「초록물고기」에서부터 보였다는 사실은 그가 단순히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가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진짜 영상예술인(artist)이라는 증거가 된다. 예를 들어, 「초록물고기」에서 막둥이가 재개발 예정 건물에 도착했을 때, 카메라가 건물 전경을 좌에서 우로 훑는데 갑자기 막둥이의 뒤통수가 나타난다. 「밀양」에서도 신애가 집에 급히 들어와 준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 카메라는 준이가 보고 있던 TV와 장난감을 훑으면서 착각하게 만들지만, 결국 맞은편에 서있는 신애를 보여준다. 이런 이창동 특유의 숏들은 「초록물고기」에서 드문드문 보이던 것이, 「밀양」에서는 수도 없이 나온다.
이창동이 영화라는 매체의 특수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데서도 드러난다. 이창동은 인물의 슬픔을 강화시키는 장치로서 ‘환상’을 이용한다. 비극적인 처지에 놓인 인물의 가장 간절한 소원을 영상으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박하사탕」에서 군복을 입고 대학생들을 쫓아다니다 총에 맞고 쓰러져 있는 영호의 눈앞에 윤순임이 보인다. 윤순임의 모습은 건물 그림자를 지나면서 웬 모르는 여대생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다. 윤순임이 걸어나오다가 그림자 속으로 쏙 들어가는 데까지 촬영하고, 그 뒤에 여대생이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을 촬영한 뒤 중간 부분을 잘라 붙여 편집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기법은 소설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로지 영화라는 매체에서만 가능하다. 영호가 간절히 바라는 윤순임의 모습을 보여준 뒤 다시 현실을 보여줌으로 인해서 현실의 비극성이 더 심화된다. 「오아시스」의 유명한 장면, 정신지체장애인인 공주가 갑자기 자연스럽게 일어나더니 노래를 부르면서 장군과 춤을 추며 노는 장면 역시 그러하다. 「밀양」에서도 죽은 준을 그리워하며 설거지 하는 신애의 뒤쪽으로 준이 지나간다. 준은 화장실에 들어가 오줌을 싸고, 신애는 깜짝 놀라 화장실로 가 “준!”을 부른다. 오줌 싸던 아이가 고개를 돌리니 준이 아닌 다른 아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신애의 애절함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착각이 사실이 아닌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신애의 마음은 몹시 절망적이고 애절하다. 이것 역시도 환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들려줄 수 있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밀양」의 신애가 너무 애절한 데 비해서, 카메라는 지나치게 냉정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비해 신애의 처지가 너무 비극적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앞서 말했듯이, 관객의 시선을 영화 속으로 끼어들이기 때문일까? 「밀양」에서의 카메라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밀양」이 다른 전작들과 갈라서는 지점이다. 예를 들어, 신애가 교도소에서 면회를 하고 나온 뒤에 꽃을 버리고 털썩 주차장 바닥에 쓰러지는 장면을 보자. 김사장의 모습이 보이는 숏 뒤에 신애의 모습이 보이는 숏이 연결된다. 김사장의 숏 뒤에 붙여진 이 숏은 두 숏의 배열과 숏의 각도, 높이 등으로 보아 김사장의 시점숏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애가 쓰러지고 김사장의 외침이 들린 뒤에도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김사장의 시점숏이라면 핸드헬드로 흔들리며 신애에게 달려가야 한다. 그러나 카메라는 너무나도 무심하게 신애가 쓰러지고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까지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틸트 다운하여 쓰러진 신애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것은 누구의 시점인가? 하나 더. 신애가 준을 잃고 처음 교회에 나가 펑펑 우는 장면이 있다. 교회에서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잡던 카메라는 신애의 모습을 잡은 뒤에, 갑자기 교회 뒤쪽 신애와는 꽤 먼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이 숏에서는 신애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고,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중인 사람들의 뒤통수만 보인다. 마치 카메라가 교회 뒤쪽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같이 기도를 드리는 것 같다. 오직 신애의 울음소리만 멀리서 들릴 뿐이다. 이것은 또 대체 누구의 시점이란 말인가? 아들이 죽은 살해 현장에 간 신애를 보는 카메라의 움직임도 그렇다. 신애는 조용히 비탈을 내려가서 강가로 다가가는데,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언덕 위에서 신애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신애의 심리가 가장 고조되고 가장 비극적인 이 장면에서 누군가의 시선인지 알 수 없는 이 카메라의 시선은 너무나도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이러한 숏들 역시 앞서 말한 이창동 특유의 숏으로서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의 하나이다. 그래서 이 숏들은 관객의 시선이다. 그러나 이 숏들은 더불어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창동의 카메라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시선일지 모르는 이 카메라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기가 움직이고 싶은 곳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냉정하다. 이것은 그래서 감독의 시선이다.
뒷부분에 이르러, 신애는 남편의 바람, 남편의 죽음 그리고 이어지는 아들의 죽음 속에서 몹시 고통 받고, 신에게로 도피한다. 신의 이름 하에 구원받고 원수를 용서하고자 한다. 그러나 용서하고자 하는 원수는 이미 신에 의해 용서가 되어있다. 남편을 빼앗고, 아들을 빼앗은 신이 결국 신애의 용서할 권리마저 빼앗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신애는 무너진다.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뼈저린 무력감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 온 뒤 신애가 지렁이를 보고 집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는 것은, 지렁이의 모습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인생이 결국은 신의 계획 속에서 지렁이와 같이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신애는 신과 대결을 한다. 신의 위선을 벗겨버리려고 한다. 교회의 야외기도회에 몰래 침입해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버리는가 하면, 장로님을 유혹해 불륜을 저지르게 하고, 김사장에게 “나랑 한 번 하고 싶은교?”라고 유혹한다. 이건 「박하사탕」에서 보던 영호의 모습이다. 혹은 「오아시스」에서 보던 장군의 모습이다. 아니, 그의 소설에서 보던 용천뱅이의 모습이다. 신애는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고 불청객이 된다. 신애를 용천뱅이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어느 평론가가 이야기했듯이, 이 영화는 또다시 한국정치사를 다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재정부에 의해 가족이 살해당하고, 그들을 용서하려고 했더니 이미 누군가에 의해(법에 의해, 혹은 사회에 의해) 이미 용서가 된 일을 겪은 민주화 운동 희생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박하사탕」에서 민주화 투사들을 고문하던 영호의 삶을 보여줌으써 독재정부 말단경찰인 그를 용서한 이창동은, 이번에 다시 그 용서의 문제로 되돌아와 ‘자신이 용서한 그들을 용서해야 할 진짜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되던지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영화가 다시 정치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그래서 이창동이 자신이 용서한 인물에 대해, 정말 용서해야 하는 건 누군지 다시 묻고 있다면, 그렇다면 이창동은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순환하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끝낸 문제의식으로 다시 돌아와 그 문제의 꼬리를 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더 원론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신애가 신을 이기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자살을 택한 뒤에,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신애가 처음 들른 미용실에서 그녀는 다시 원수의 딸을 만난다. 신애가 직접 이야기하듯이 ‘왜 하필 오늘, 하필 이집이냐’는 것이다. 신애는 그 말을 한 뒤 하늘을 ‘째려’본다. 신애는 이것을 신의 탓으로 돌린다. 신애는 이 시점에 이르러서 처음에 그렇게 무시하던 ‘신의 존재’를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매 순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객에게도 설득력이 있다. 신의 개입이 없다면, 이런 우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우리는 이 영화에 숨겨진 마지막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 신애의 머리 자르는 모습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조용히 잘려진 머리카락을 내려보더니, 그 머리카락을 좇아 엉뚱한 곳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인물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닌, 그렇다고 스토리를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닌, 아무 목적 없는 카메라의 이동이다. 필자는 이 숏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숏은 카메라가 스스로 자신의 비밀을 밝히는 동시에,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다. 즉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준의 시점숏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더럽고 지저분한 흙바닥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점숏으로 끝맺음 하는 것이다. 흙바닥에는 쓰레기 몇 개와 햇볕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신의 두 손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찮은 신애의 삶처럼, 우리의 인생처럼 말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누구의 시선일까? 그것은 바로 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카메라의 시선이 신의 시선이었다는 사실을 이 마지막 장면에서 깨닫게 된다. 줄곧 신의 시선이 함께 해왔다는 것을 말이다. 「밀양」을 한번 다시 본 뒤 이것이 분명해졌다. 이창동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스테디캠과 핸드헬드를 뒤바꿔 사용하고 있다. 준이 납치된 뒤 김사장에게 뛰어가는 신애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놀랍게도 스테디캠이었다. 영화에서 핸드헬드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인물의 심리를 카메라에서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인물의 심리가 흔들리고 슬플 때 카메라도 함께 떨림으로써 그 슬픔을 카메라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때 카메라는 인물의 시점숏이 아니더라도 인물의 시점이 된다. 반면 스테디캠은 카메라를 카메라맨의 몸에 부착한 채 인물을 따라감으로써 카메라가 전혀 흔들리지 않게 하는 촬영기법이다. 그런데 신애가 몹시 슬퍼하는 이 장면에서 이창동은 스테디캠을 사용하고 있다. 오히려 신애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거나, 집에 앉아 가만히 설거지를 하거나, 혹은 교회에서 가만히 앉아있을 때 다른 영화에서라면 고정샷으로 촬영이 되었어야 할 이 대부분의 장면들은 핸드헬드로 촬영되었다. 이 핸드헬드는 분명 신애의 심리 투영일 수 없다. 일반 관객이라면 쉽게 눈치 채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이창동은 이렇게 핸드헬드와 스테디캠 촬영을 바꿔 사용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영화 촬영 관습을 전복시키고 있다. 따라서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누군가 제3자의 시선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히치콕이 숏과 숏 사이에 제3의 시선을 ‘끼워 넣음’으로써 영화를 ‘봉합’했지만, 이창동은 제3의 시선을 ‘끼워 넣음’과 동시에 영화 전체를 제3의 시선으로 ‘뒤덮고’있다. 이것이 ‘밀양’이라는 제목에 담긴 혹은 「밀양」이라는 영화에 담긴 비밀이며, “보이지는 않지만 햇볕 한 조각 안에도 다 신의 섭리가 담겨있다“는 영화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영화를 함께 따라간 관객들 또한 신애와 같이 신의 존재를 어슴프레나마 느낄 수밖에 없다. 영화관을 나오는 관객은 자신을 따라오는 제3의 시선이 존재한다고 느끼게 된다. 신애와 함께 질곡의 삶을 관통하면서 관객 역시도 신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며,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새로운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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