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한

사진 기자와 신문사를 빠져나와 차에 시동을 걸고나니 1시 50분. 인터뷰이와의 약속 시간을 맞추기엔 이미 늦은 시간. 차가 도로로 진입하자마자 서울역에서 신호대기. 빨간불이고 신호대기고 뭐고 무시하고 수동 모드로 밟아야 할 상황인데, 내 차가 아니라 회사 차이니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다. 성질 급한 인형태가 신호 위반을 한 것이 아니라 좃선 일보사 기자가 신호 위반을 한 것이 되버릴테니. 서소문사거리에서 신호 대기. 사실 회사 사명이 차에 떡 하니 박혀있는 건 취재처의 주차경비에게 긴 말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빼고는 도움이 될 때가 거의 없다. 충정로삼거리에서 신호대기. 젠장. 이 놈의 융통성 없는 자동 운전 모드 같으니! 그새 조수석에서 잠이 들어버린 나진영을 보니 발을 구르는 건 나만인 것 같아 괜히 억울해진다. 수습이니 오죽 피곤하겠느냐만은. 박정후는 이 마음을 알까?
전화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니 화면에 박정후의 얼굴이 비친다.
“네, 월간조선 인형탭니다.”
“인기자님. 저 박정훕니다. 오늘 2시로 잡은 약속을 3시로 미룰 수 있을까요? 급한 일이 생겼네요. 죄송합니다.”
“아? 네? 네, 뭐 잘 됐네요…”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이니 화면이 사라지면서 연결이 종료된다. 휴우. 조금만 서둘러 나왔으면 진작 이렇게 여유있게 가는 건데. 아현동사거리에서 신호대기. 투덜투덜거리고는 있지만 한결 마음이 편하다. 한동안 그와의 인터뷰는 다른 이가 전담했던 터라 그의 목소리를 듣기는 오랜만이다. 인터뷰를 데스크에서 잡아 일방적으로 나에게 준 터라 인터뷰 직전까지도 박정후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오랜만에 그의 목소리를 듣노라니 사람에게 확신을 전달하는 그의 음색이 반가웠다. 다음 달이면 그와 그분의 유전자 일치 검사 결과가 나온댔지. 어디보자, 첫 번째 인터뷰하던 때가 몇 년도였더라. 차는 공덕역사거리에 다다랐고, 나의 생각은 추억의 한 켠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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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X년 모월 모일
“아니, 지금 증거가 없잖아요, 증거가. 어떻게 날 보고 당신이 박정희의 복제 인간이라는 걸 믿으란 말입니까?”
“인기자님. 저도 참 답답합니다. 뭐라고 보여드릴 것도 없고요. 하지만 정말 확실합니다. 제 인생을 걸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박물관내 카페에는 우리 둘 뿐이다. 자신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복제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남자를 취재하러 서울역사박물관에 관람료까지 내며 찾아 온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만 하면 정신 나간 사람이 하는 소리와 다를 게 무언가.
“이봐요. 체세포 복제로 양 한 마리 복제한지 이제 십년이 겨우 지났소. 인간 개체 복제는 아직 그 기술이 요원한데, 게다가, 당신 나이의 사람이 복제 인간이려면 삼십여년 전에 복제가 성공했다는 건데, 날 보고 이걸 믿으라고요?”
“기자님도 당황스러우시죠? 3개월 전의 제 심정이 딱 그랬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괴로웠죠.”
서른이 다 되어간다고 대강의 나이를 밝힌 그의 이름은 박상후. 6개월 전 자신이 박정희의 복제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나이를 만 스물아홉으로 알고 있었으나 6개월전 자신을 다녀간 어느 사람이 일러준 바대로라면 그의 출생은 1970년대 후반의 어느때로, 정확한 생년은 다소 불확실했다. 며칠 전 그가 월간 조선사에 인터뷰를 청했고, 정치부 기자인 내가 인터뷰어로 배정되었다. 복사기조차 못 다루는 내게 복제는 무슨 복제람. 이런 건 과학부 기자에게 맡기던가. 어렵사니 복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찾아봤지만, 더욱 더 의아해졌다. 이건 마치 18세기에 컴퓨터를 만들었다느니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지금 이뤄지기에는 너무 이른.
“후- 그래 좋아요. 정리해봅시다. 지금 당신 주장의 근거라면, 6개월 전 다녀간 어떤 이의 증언. 당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에서 미뤄볼 수 있는 출생 소재의 불확실성, 외모에서 느껴지는 박 전 대통령과 유사함. 그리고 당신 자신이 느낀다는 강한 동질성. 이게 단데… 6개월 전에 다녀간 이의 정체는 짐작이 가나요?”
“일단 그 사람이 제가 복제된 정황,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유사시를 대비해 박정희 대통령의 복제인간을 만들자는 계획이라든가 그런 여러가지를 포함한 구체적인 고급정보들을 많이 알고 있었거든요. 일단 저를 자녀 없는 가정에 입양을 시켜놓고, 유사시에 저를 데려가려 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본건데, 마치 철종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아무튼 당시 정권의 내밀한 속사정을 잘 알고 있던 굉장한 고위 관료가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그 연구소의 책임자일 수도 있겠네요. 그 사람이 저라는 사람이 태어나기까지의 여러 실험과 실패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줬거든요. 아까 기자님께 간략히 말씀드린 것처럼 복제양 돌리의 탄생과 같은 핵치환으로 말이죠.”
“그 사람, 뭐 일단 김부장 정도로 해둘까요? 그 김부장의 얘기가 굉장히 고급정보이면서 여러모로 짜임새가 있었다?는 건데… 이봐요, 당신, 당신은 로즈웰 사막에 나타난 외계인에 대해 굉장히 체계적인 정보가 있다고 해서 그런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나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와 저의 이야기를 같은 선에 두고 이야기하시면 곤란…”
“플롯만 있지 팩트가 없잖아요. 팩트가.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 하게 하는데… 그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나보고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짐작과 개연성은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초선의원과도 같다. 처음부터 쉬이 적응한 초선의원은 뭐 그러겠거니 하지만, 몇몇은 곧잘 눈에 띄는 짓을 해서 참신하다느니 모난돌이라느니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런 태도로 일관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 역시 주변의 다른 의원들과 같은 족속이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초선의원이 삐딱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특별한 무엇을 기대하지 않게 될 것 같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다. 처음의 그런 삐딱선을 줄곧 가져가는 모나디모난돌이 몇몇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줄곧 지켜보며 자신의 직감에 대해 흐뭇해하는 것은 정치부 기자가 가질 수 있는 나름의 즐거움이다. 짐작과 개연성도 그런 것이, 짐작은 가고 개연성은 있지만 선뜻 믿어버리기 찜찜한 제보나 이야기의 태반은 과장이거나 억측일 때가 많다. 하지만 어쩌다 한번씩 그런 짐작과 개연성이 때로는 묵직한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는 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기자는 결국 개연성과 짐작을 다루는 데 도사가 되어야 한다. 지금 나는 내 눈 앞의 개연성과 짐작을 판별하고 있다.
“네, 저도 참… 답답합니다. 심증, 심증, 심증 뿐, 물증이 없네요. 박 전 대통령님의 유품이야 지금도 많지만, 어디 그분의 유전자를 채취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어서요. 그런 것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유전자 일치 검사를 받아 증명해보이고 싶네요.”
“박정희기념관이 세워진다던데, 완공되면 한 번 가봐요. 거기에 뭐라도 있을 줄 누가 아나요?”
“뭐라도 있긴요. 기념관이 세워지려면 아직 최소 십년은 더 있어야 할 겁니다. 건립위원회만 겨우 있을 뿐, 돈도 없고, 나서서 도와주는 이도 없고…”
비꼬는 말을 그렇게 받아들일 필요없었는데 박상후는 제 딴에 제법 심각해진다. 나도 뭐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둘 다 침묵. 에라 모르겠다. 몸을 의자에 묻고 천장을 무심코 바라보니 나무 막대로 된 십여개의 수직선과 수십개의 수평선이 빼곡히 교차하고 있었다. 몇몇 교차점에는 전등이 달려 그 주변이 유난히 밝았다. 어쩌자고 주인은 저기에 전등을 달았을까. 그런데 서울역사박물관내 카페 주인도 공무원일까? 딴전을 피우다 한번 그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자니 눈매나 입매가 정말 박정희와 꽤나 유사하게 보인다. 부드러운 말투와 미소에 묻혀 미처 눈에 띠게 들어오지 않았던 다부진 눈매. 앙 다문 입술. 날카로운 턱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첫인상에서는 미처 못느꼈는데… 아, 키가 너무 커서 박정희의 느낌이 아니었었나 보다. 내 키도 백칠십 중반으로 또래 중에서는 평균 이상이었지만,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눈을 마주치기 위해 꽤나 치켜 올려다 봐야했다. 그렇게 큰 키에다가 빗어넘겨 뒷목께에서 질끈 묶은 꽁지머리를 하고 있으니 첫인상에서 박정희를 떠올리기 어려웠었던 것도 당연하다. 둘의 침묵 사이로 카페 주인의 안목을 가늠할 수 있는 흘러간 여가수의 노래가 넓다란 카페에 가득 채워지는 동안 박상후의 눈빛은 변함이 없다. 박정희는 저런 눈빛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곤 했을까?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슬금슬금 개연성과 짐작이 들고 일어나려 한다.
“키가 꽤 큰 편인데, 자신의 큰 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 예… 제가 좀 크죠.…”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꽤나 작지 않았습니까?”
박상후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기자님도 모르시진 않을텐데요. 복제인간은 다른 시대에 태어난 쌍둥인걸요. 외모가 어느정도 흡사할 수 있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이 되는 건 아닙니다. 박 전 대통령님이 자라던 시대보다 제가 자라던 시대가 훨씬 풍족했으니까요. 잘 먹고, 잘 컸죠.”
나도 아는 사실이지만은 참 편하게 생각하고 있군. 복제 인간이라면 거울에 비친 상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와 닮은 점이 별로 없는 그의 첫인상에 처음에 의아해했었다. 이제야 좀 닮은 모습이 드러난다. 확실히 박정희와는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 흡사한 느낌의 이 친구. 실제의 박정희가 환생했다면 오늘날 이런 모습일까. 개연성과 짐작을 위해선 어쨌든 정황을 좀 더 들어봐야한다.
“좋아요.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봅시다. 6개월 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죠. 그걸 왜 지금 알리는 거죠? 알릴 생각이 없었다 마음이 바뀐 건가요?”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복제인간이라니요. 전 그냥 평범하게 박물관에서 이 도시의 도시역사를 연구하던 사람이었는 걸요. 그런데 절 보고 복제인간이라니요. 저와 똑같은 사람이 세상에 먼저 살았었다니요. 그리고 그게 하필이면 박 전 대통령님이라니요. 어떤이의 숭배와 누군가의 증오롤 동시에 받고 있는 그럼 사람이라니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또 제가 박 전대통령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너무 괴로웠습니다.”
다부진 눈매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물을 한 잔 들이키고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아닌게 아니라 나야말로 배가 고팠다. 그새 시간이…. 카페의 서향 통유리를 통해 깊숙히 들어오는 것은 저물어가는 빛바랜 태양이었다. 아직도 제법 따가운 빛이 그의 등 뒤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등에서 발광하는 빛에 눈이 제법 부셨다.
“고등학교 때 제가 입양아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부모님도 제 출생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하나도 모르고 계셨어요. 여느 입양아가 그렇듯 저도 친 부모님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죠. 그랬던 저였지만 제가 박 전 대통령님의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을 접하고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좀 의연한 면이 있거든요, 일단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후 입양아가 자신의 부모를 찾아나서듯 박 전 대통령님에 대한 자료들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상후는 6개월 가까이를 박정희의 사료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마음에 품고있던 사회와 국가에 대한 막연한 책임의식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의 말대로라면 박정희의 유산, 아니 유전자가 박상후에게 고스란히 상속된 것이다.
“물론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죠. 제 키를 봐도 알 수 있고요. 하지만 제가 자란 가정환경 등이 박 전 대통령님의 어렸을 적 가정환경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제 아버님도 우국지사셨거든요. 하하. 덕분에 그 분이 가지고 계셨던 성격적인 특질들이 발현되는데 유리했던 것 같고요.”
“아무튼 그러니까 당신 이야기는 그렇게 6개월동안을 자신의 유래를 찾는데 몰두했다는 거죠. 그분의 저서, 증언록,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것들을 통해 박정희의 생각과 사상을 알고 싶었던 거고요.”
“네, 제가 아무리 그분의 복제인간이라고 해도 저는 저고 그분은 그분이니까요. 그분의 생각을 알려면 그런 매체를 통해 그분의 생각을 접하는 방법 밖예요. 어떻게 보면 참 행운아인 거죠. 만약 제가 평범한 사람의 복제인간이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하지만 박 전 대통령님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죠.”
“그렇게 반년 가까이 기록을 가까이 했다는 거고요, 그리고 마침내는 이 사실을 사회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요? 어떤 역사적인 책임감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네, 그런 어떠한 역사적 책임감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역사적 책임감이란… 근깐… 참,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이렇게 막연하게 밖에 이야기할 수 없어 참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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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면으로 갑시다!”
“네? 증거랄게 딱히 없는 확실하지 않은 건인데도요? 조 대기자님 기사 정도 되야 20면쯤 나가는 거죠.”
“그럼 자네 이름 달고 기사 나가게 해줄게. 인형태가 만난 사람. 어때? 괜찮지?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인형태의 만인보. 오우, 괜찮네, 괜찮아!”
한다면 하는, 그리고 하면 된다고 믿는 전부장이기에 40면 기사가 실릴 것은 이미 정해진 것 같았지만, 아직 내 스스로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네, 그렇죠. 굉장히 흥미를 끄는 정보원이었고, 저도 샅샅이 인터뷰를 해왔으니까 까짓것 뭐 40면 채우는 거야 할 수 있죠. 저도 솔직히 그 사람 말이 사실이면 어쩌나 하는 느낌까지 들었고요. 하지만 역시 좀 더 사실 관계가 밝혀진 다음에 기사를 내도…”
“인기자, 기자생활 몇 년짼데 아직도 그렇게 감이 없나?”
“아유, 전부장님 그런 말씀하시면 섭합니다. 정치부 기자한테 감이 없다뇨.”
박상후 건의 짐작과 개연성에 대해 정리가 아직도 안 된 상태에서 40면은 아무래도 섣부른 것 같았다. 기자가 이렇게 판단이 굼뜨면 안되는데 좀처럼 이번은 힘들었다. 그의 말을 믿는다면 대박기사 중에서도 대박이기 때문에 당연히 40면 정도는 가야겠지만, 아무래도 조심스러웠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조부장의 표정이 근엄해지기 시작해졌다.
“자네도 알다시피… 모든 취재가 기사가 되진 않아. 하루에도 수십 수백건의 일들이 터지지. 우리에게 선택選擇을 요구해오는 사건事件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보면 참 무력해. 어디 그 뿐인가. 예전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던 혹은 선택했던 수많은 사건들도 다시 한번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며 자신들이 실재實在했음을 증명해보이고자, 다시 상기시키고자 하네. 무력해 보이는 우리가 그들 앞에서 권력權力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준엄峻嚴한 잣대가 그들을 제한시키기 때문이지. 그리고 현재는 지금 우리의 손에 있네. 준엄이 부여하는 바로 그 제한, 바로 그 기준基準이 무엇이겠는가? 기사가 될 것을 취사선택하는 기준은 시대정신時代精神, 시대정신이야. 물론 그 친구가 믿고 있는 사실이 거짓일 수도 있지. 자네 말마따나 증거가 없으니. 하지만. 생각해보라구. 왜 하필이면, 지금, 박정희인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정신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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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亨泰의 萬人譜] 朴正凞의 複製인간이라고 주장하는 朴相厚의 인생유전 「저 역시 조국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거의 한반도가 들끊을 정도의 반응이었다. 한국과학기술인총연합회에서 이례적으로 과학적으로 검증 안된 흥미 위주의 사건을 함부로 싣는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한국생명과학자협회도 현재 기술로도 불가능한 인간 복제를 삼십여년전에 성공되었을리 없다며, 최소한의 과학적 검증도 불가능한 사안을 섣불리 기사화한 것에 대해 선정적 언론 보도를 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생명윤리학회와 기독교계에서는 입을 모아 만약 실제로 박상후가 복제 인간이라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의 복제인간 탄생국이라는 실로 부끄러운 오명을 쓰게 되고 이번 사건은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신호탄이며 인간을 복제하는 시대에서라면 머지않아 생물 다양성이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모았다.
조금 우스운 반응은 이른바 보수계열 단체에서 나왔다. 비유하자면 보수진영에 수류탄을 던진 셈이랄까. 인간복제라는 그들의 관념상 받아들이기 꺼림직한 주제에 대해 처음 그들은 당황하였다. 어이구머니나 세상에. 도대체 복제인간이라니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인가. 더군다나 하필이면 박정희의 복제인간일 것은 또 무언가. 복제양 돌리의 발표 당시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박정희 대통령이 뽑혔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작 그런 당사자가 실제로 나타나다니 이 무슨 몹쓸 짓인가. 하지만 조금 지나자 박정희의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굉장히 흥분시켰다. ‘박정희기념관 건립 사업 추진위원회’에서는 기념관 설립을 조속히 재개하여 두 인물에 대한 면밀한 비교 조사가 이루어져야한다고 촉구했다. 방송을 한 두 차례 타는가 싶더니 뉴스에도 곧잘 나오는 전국적인 스타가 된 박상후는 보수단체의 온갖 강연에 초청되기까지 했다. 키가 훤칠하니 인물이 훨씬 낫다며 청출어람 소리를 듣기도 했다. 박상후는 그의 소박한 소원대로 박근혜와 박서영, 박지만을 만나게 되었고, 세 남매는 그에게서 기시감을 느꼈던 모양인지, 그의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의붓동생을 삼듯 그를 받아들였다. 종종 모임을 가지며 세 남매는 애틋한 정을 보였고, 박상후 역시 큰누나와 큰형을 따르듯 그들의 관계로 성큼 편입되었다.
이름까지 박정후로 바꾼 그가 평범한 박물관 직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역사적 책임감을 감당하기 위한 길을 선택하리라. 파시즘적인 열광 앞에서 진실 규명에 대한 나의 머뭇거림이 우스워졌다. 조부장의 말마따나 박정후가 박정희의 진짜 복제인간인지, 아니면 사기꾼인지, 아니면 그도 누군가에게 속은 것인지는 대중들 사이에서 그렇게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시대정신, 시대정신이 중요한 것이었다. 박정희를 다시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만족스러워했다. 누군가는 향수에, 누군가는 전설의 주인공을 만나는 듯한 신기함에, 누군가는 복제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흥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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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X년 모월 모일
“오랜만입니다. 인기자님.”
“네, 오랜만입니다. 박의원님.”
“나진영이라고 합니다. 사진 찍으러 왔습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의원 회관 7층 사무실. 여유있게 도착해 박정후를 기다리며 둘러본 사무실은 자질구레한 물건 하나 없이 깍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인사는 깍듯했고, 이제는 이마도 깍듯했다. 서서히 넓어져가고있는 박정후의 이마를 보니 이제 그도 제법 국회의원다워보였다. 초선 의원이 로열층에 자리잡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텐데. 연고도 없는 구미에서 박정후는 몰표에 가까운 득표율로 경북 구미의 지역구 의원이 되었다. 다선 의원의 중량감을 지니고 의회에 등장한 그가 33인을 대표하여, 등원 후 처음으로 발의한 안건은 ‘박정희기념관 건립 사업 국고보조금 안정화에 관한 개정법률안’이었다.
21세기의 첫 십년이 지나가고 두 번째 십년이 한참 지나가고 있는 아직도 인간 개체 복제 소식은 멀게 느껴진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인간 체세포 복제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인간 개체 복제를 연구하는 몇몇 과학자 집단은 그러한 법안이 없는 나라에 연구시설을 설치하고 윤리적 비난을 묵묵히 감수하며 연구를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시점에서 인간 개체 복제를 성공한 나라, 게다가 그 복제 인간에 대해 국민적 호의를 갖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단 한 곳, 한국뿐이다. 박정후의 말이 사실이라면.
첫 인터뷰 이후로 두세달마다 한번씩 그의 기사를 싣곤 했던 우리 잡지에는 등원 2년 전부터 그의 고정 기사가 짧든 길든 매달 실렸다. 우리는 박정희를 계속 노래할 수 있었고, 그는 지면에 자신을 계속 노출시킬수 있었다. 그의 고정 기사를 담당하던 정치부 송기자의 출타로 이번에는 내가 지명되었다. 그의 정체에 계속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오랜만에 뾰족한 인터뷰를 하리라 벼르고 있다. 이번에 내가 작성할 기사는 특집 기사의 형식을 띠고 나갈 것이다. 아무래도 다음달이면 그 소식이 발표되는 만큼…
“새마을 운동에 버금가는 일대 사업을 조만간 같은 당 소속 의원들과 공동으로 발의할 예정이시라 들었습니다.”
“아, 네. 새로운 소식이 있을 때마다 월간 조선과 가장 빨리 인터뷰하고 싶은데 언제나 이렇게 먼저 찾아와주시니 제가 참 감사합니다. 봅시다. 법안 이름이, ‘사회서비스산업 집중 육성 및 국제허브단지 육성을 위한 기본법안’, 줄이자면, ‘사회서비스허브법’정도로 해두죠. 항상 제가 강조하는 말이지만, 나라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선견지명이 있어야 합니다. 박 전 대통령님의 시대에서는 경제발전에 국가가 책임을 지고 진력하는 것이 시대의 요구였고 그분께서 그것을 이뤄내셨습니다. 그러한 선견지명은 지금도 동일하게 필요합니다. 세계는 이미 노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복지에 대한 세계인의 욕구가 점점 세계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의료 쇼핑, 웰빙 여행이 이제는 서구에서도 적잖습니다. 바로 이 산업을 우리 나라가 선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점할 수 있습니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한 우리민족이 신발이고 가발이고 제철이고 해운이고 반도체고 해낸 것 아닙니까. 더군다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남을 공경할 줄 아는 전통의 예의 문화는 서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유교문화권인 한중일을 통틀어서도 가장 훌륭하게 전수되어왔다 자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한국이야말로 의료 서비스와 복지 서비스, 휴양 서비스의 세계적 허브가 될만한 경쟁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이미 전국 곳곳에 난립하다시피하는 온천과 골프장, 위락시설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그 한 방안이겠고요, 뿐만 아니라 각종 의료 서비스 및 복지 서비스 산업의 진흥을 통해 세계인의 의료 쇼핑과 웰빙 여행을 우리 한국으로 유치해야 합니다.”
일장연설. 그의 확신에 찬 언변은 등원 후 더 세련되어졌다. 예전에는 단호함이 느껴졌었다면 이제는 권위자의 여유로움이랄까. 나진영의 표정을 보아하니 박정후에게 감화받았는지 사진기를 내려 놓은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사회서비스허브법’에 대한 일련의 설명을 듣고나니 이제는 내차례이다.
“네, 박의원다우신 생각이시군요. 그건 그렇고. 사실 오늘 여기 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거든요. 박의원님이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 아, 디엔에이 프로파일링(DNA profiling) 결과 발표 말이지요…. 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님 기념관 사업이 진행되면서 전국에서 관련 유품들이 속속 몰려든 것이 그 계기가 된 셈이죠. 그분의 신체 검사를 담당했었던 서울대병원에 그분의 혈액이 보관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 반가웠던 거억이 나네요.”
박정후와 박정희의 디엔에이 프로파일링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이 한달 전. 무력하게 묻어놓아야 했던 당시의 개연성과 짐작을 그제서야 파헤쳐 끌어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이라고 그의 주장의 신빙성을 더해줄만한 증거가 별로 늘어나지도 않았다. 이번 검사의 결과는 명백한 승리 혹은 혹독한 비난을 낳을 것이다. 이제와서 분명하지도 않았던 내 짐작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만은, 박정후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다.
“그러게 말이죠. 그게 불과 1달 전 이야기네요.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박의원을 박정희의 복제인간이라고 믿고있지만, 사실 여부를 증명하는 것 자체가 여태까지 불가능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박의원님은 검사 결과에 대해 확신하십니까? 혹시, 호옥시라도 말입니다. 다르다-라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이 제로가 아닌 이상 말이죠.”
“인기자님… ”
떨구어졌던 그의 고개가 다시 올라가고나서야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에… 사실 그분의 책을 읽지 않은지 꽤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런 자료들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요…. 제가 그분의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만 해도 제가 누군지 너무 궁금했고, 저라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라 생각했기에 그러한 자료들을 탐독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무어랄까요. 예전에는 저와 박 전 대통령님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저로서 사는 것인지 박 전 대통령님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인지 불분명할 정도로요. 제가 추구하는 가치들은 그 분이 가지고 계셨던 것들과 동일했고, 항상, 그분이시라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를 되뇌이곤 했었지요.”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그렇죠…. 정체성. 그러니까 저라는 사람, 박정후라는 사람에게 있어서 박 전 대통령님이야말로 제 삶의 근원이자 저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는 굳이 그러한 기록들을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궁금함이랄까 확신없음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공자왈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라 한것처럼 제가 하고 싶은대로 하고 생각나는 대로 생각하여도 박 전 대통령님의 행동과 생각에 어긋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한달 전에 그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목이 타는지 물을 한잔 들이킨다.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회의에 휩싸였습니다. 만약, 내가 그분의 복제인간이 아니라면? 내가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사실은 거짓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죠. 그러면 더 이상 제 자신이 제가 아닐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마치 서른 즈음에 그때 제가 그분의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감당하기까지 엄청난 심적 부담을 감내해야했던 때처럼 말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물을 한 잔만 더 마시겠습니다. …꿀꺽꿀꺽… 하아- 물론 그때와는 성격이 다르지요. 그때에는 내가 누군가의 복제인간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놀란 것이고, 지금은 내가 누군가의 복제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에 놀란 것이니까요. 참… 어떻게 보면 우습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복제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식에 놀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야기겠지만, 저에게는 아닙니다. 저에게는 아닙니다. 지금 내안에서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삶은 그럼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나는 나 혼자의 망상 속에서 그토록 우스운 짓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온 것인가? 인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결과발표가 거짓으로 판명날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기자니까 기사를 써야죠.”
“그러니까 기사에 무어라고 쓰시겠냐고요?”
그걸 자꾸 내입으로 자신의 면전에 두고 말하게 하다니, 듣는 사람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 같은데, 말하는 사람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충격적인 일이라고 써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난처한 질문을 드리고 있는 것 같네요. 아니요. 편하게 그냥 말씀해주셔도 좋습니다. 저는, 저는 말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두렵고, 또 염려가 됩니다. 사실 저만 하더라도 제가 왜 그렇게 그 사실을 철썩같이 믿어왔는지 이유를 대라면 뾰족한 이유를 댈 수가 없습니다. 그냥 믿어졌어요. 오히려, 그냥 믿어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내가 그분의 복제인간일 것이다라는 확신을 더 주었습니다. 그랬던 저이기에 만약 거짓이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스스로에게 굉장히 부끄러워지고 화가 날 것 같아요.…”
침통한 표정에 나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박의원님… 박정희를 그토록 사모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이야기신가요?”
“아닙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화가 난다든가, 수치심이라든가 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예감을 근거로 자신뿐만 아니라 온 국민을 속인 그런…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님을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롱한 셈이 되다니… 저 때문에 박 전 대통령님의 명예가 훼손된 것 같고, 또한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 저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을 욕보이는 것 같고… 생각하자면 정말 한도끝도 없습니다. 정말 어떡해야할는지를 모르겠어요.”
“네, 물론 국민들에 대한 여러 마음들 크시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입니다, 박의원님, 박의원님이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것에 있어서 그분이 없다고 해서 무엇이 부족해지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내면화되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기야 하셨지만, 어쨌든 이미 독자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계신 것이고요.”
“…지금 이 나라와 국민들 앞에 큰 잘못을 범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솔직히 다른 생각을 돌볼 겨를이 없네요. 지금으로서는 그저 착잡합니다.”
이거야 원…. 참담한 분위기다. 비서관에게 물 한잔을 부탁해 나도 한잔 들이킨다. 이제서야 비서의 표정이 눈에 들어온다. 그야말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나진영은? 방금까지 박정후가 이야기할 때 조용히 몇 컷을 찍더니 제풀에 시무룩해져있다. 이거야 원….
“글쎄요, 뭐라 말씀드릴 수 있을지…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떻겠습니까? 과거야 어찌됐든 현 상황에서 박의원님이 움직이실 수 있는 정치적인 영역이 엄연히 존재하시는 거고요, 그 영향력이 다소 줄어들 수야 있겠지만, 박의원님이 가지고 계신, 정책들, 지향들을 이루어 이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그 마음은 그대로이신 것 아닙니까? 계속 그렇게 활동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 * * * * * * * *

신문사로 돌아가는 차 안은 고요하다. 오면서는 나진영이 자느라 조용했다. 지금은 나진영도 나도 자못 심각하다. 박정후의 고뇌를 우리가 한보따리 떠안고 가져온 기분이다. 박정후로서는 검사결과가 진실로 밝혀져봤자 본전 아닐까? 거짓으로 판명되면? 그의 말대로 정말 나라가 들끓을지도 모르고 그의 본의도야 어찌됐건 속았다는 느낌에 많은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정치인이건 연예인이건 대중의 관심이 쏟아지는 직업인 이상 그의 예상대로 그는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본전이거나 하차라면…
조금 더 과감하게 결과 발표 전에 미리 자진하차를 하면 어떨까? 결과 발표는 1주일 뒤니까 시간은 충분하다. 자신의 심정을 있는대로 소상히 밝히는 거다. 자신은 굳게 믿고 있지만, 자신의 확신과는 별개로 근거가 마땅찮기 때문에 어쩌면 거짓일 수 있다. 만약 거짓이라면 그동안 자기 자신과 국민들을 속여온 꼴이 된다. 그러한 자세로는 더 이상 국민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위치에 있을 수 없다. 결과의 사실 거짓 여부를 떠나서 스스로에게 부정직했던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국민들에 대한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 오 이거 괜찮다. 말 되는데. 박정후는 자신이 박정희의 복제인간임을 사실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의로 무엇을 꾸며내었다고 보기도 힘들 것이다. 어쩌면 국민여론이 이외로 선선하게 그를 지지하는 쪽으로 변할 수도 있다. 거짓이라고 밝혀질 것을 두려워해서 먼저 치고 나온 것 아니냐는 얘기도 물론 흘러나오겠지만, 지금껏 해온 그의 일관성의 원칙을 따라 사퇴를 밝히면 많은 수의 사람들이 수긍할 것이다. 그러면 이번 임기야 제대로 못마쳐도, 다음 총선에서 다시 출마할 수 있겠지. 그때에는 불확실성이 제거된 후겠으니 적당한 지지세력도 자리잡혔을테고.
전화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니 화면에 박정후의 얼굴이 비친다.
“네, 박의원님. 월간조선 인형탭니다. ”
“인기자님. 저 박정훕니다. 기자회견을 하고 싶습니다. 내일 오후 쯤에 하면 모레 조간에 실을 수 있겠죠?”
“아? 네?”
기자회견. 이번에는 나의 개연성과 짐작대로 맞아떨어진 것일까? 내일 대강의 약속시간과 장소를 들었다. 고개를 다시 한 번 끄덕이니 연결이 종료된다. 잔영이 잠깐 남는다. 나진영을 보아하니 이번엔 또 눈만 껌벅껌벅 감았다떴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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