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 부문 가작] 사람에 대한 영화 「밀양」, 비밀스런 빛을 찾아서
[영화평론 부문 가작] 사람에 대한 영화 「밀양」, 비밀스런 빛을 찾아서
  • 대학신문
  • 승인 2007.12.02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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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석

「밀양」은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전도연의 신들린 연기에 전세계가 매료되었다고도 했다. 이윽고 한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유명세를 탔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종교 영화라고 평가했다. 그 중 많은 사람은 영화가 반(反)기독교 영화라고도 말한다. 왜 기독교를 이렇게 묘사했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쏟아졌고, 기독교의 이중성을 폭로한 영화라는 칭찬도 나왔다. 물론 기독교와 기독교인이 영화의 주된 요소로 등장하고 있으며 하느님과 그의 구원과 용서가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지배하고 있음으로 이 영화를 종교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기독교를 절대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기에 반(反)기독교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이창동 감독은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 「밀양」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을까?
「밀양」의 많은 모티프는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에서 찾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밀양」은 종교 영화라고 하기에는 영화에서 하려는 이야기의 내용이 너무나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밀양」의 세계관은 종교적인 세계관이라고 보기 힘들다. 용서라는 전체적인 영화의 중심 주제에서 이창동 감독은 기독교와 하느님을 주연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측면에서는 불교적인 색채가 영화에 묻어나기도 한다. 신애가 굳이 밀양으로 이사 온다는 내용에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밀양은 주인공 신애에게는 절대 축복을 땅이 아니다. 고통의 땅이다. 고로 집착을 땅이 바로 밀양인 것이다.
비밀스러운 빛(secret sunshine)이라는 뜻을 가진 「밀양」의 배경은 밀양이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다 죽은 주인공 신애의 남편 고향이 바로 영화의 배경이다. 세상사의 찌들대로 찌든 신애의 입장에서 보기에 밀양은 지상의 낙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느님의 품도 아니다.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냥 쳐다보기도 싫은 곳, 그곳이 바로 밀양이다. 굳이 이런 곳에 신애는 인생의 2장을 열기 위해 내려온다. 단지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고 떠난 남편의 고향일 뿐 아무런 연고도 없고 그렇다고 인생이 추억이 있는 곳도 아닌 밀양에서 그녀는 새 삶의 보금자리로 선택한다. 용서하기 힘든 고통의 땅을 신애는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어 내면화하려는 것이다. 집착일 수도 있고, 삶의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지일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간에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와 정착한다는 영화의 시작은 전체적인 큰 주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밀양」이 종교영화가 아닌, 기독교 영화는 더더욱 아닌 이유이다. 밀양은 신의 선택이 아닌 다른 그 누구의 선택도 아닌 신애의 선택이었다.

벌레 이야기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밀양」은 이청준의 1985년 작 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 소설과 영화를 모두 접한 사람들은 느낄 수 있겠지만 원전을 영화로 재해석한 다른 많은 작품들 중 많은 경우가 원전에 미치지 못한다고 혹평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밀양」은 매우 성공적으로 원전을 뛰어넘고 있다. 원전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원전에서 미쳐 내리지 못한 결론을 영화는 충분히 풀어내고 있다. 또한 그것 이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능력에 감복할 수밖에 없다.
이창동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읽고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아무 잘못을 하지 않는 알암이의 죽음, 그리고 그 가해자가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음으로써 느끼게 되는 알암이 엄마의 절망. 광주 민주화 운동을 머릿속에 새기고 「벌레 이야기」를 읽는 다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신군부의 군홧발에 짓밟힌 광주 시민에 대한 용서가 과연 누구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인 광주 시민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내려진 용서와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 그 속에 광주 시민은 설자리를 상실하게 된다. 용서의 직접적인 당사자의 자리가 없어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밀양」의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벌레 이야기」의 것과 많은 부분 비슷하다. 물론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송강호가 연기한 김종찬 같은 인물이 추가되고 신애가 다른 지역에서 이사를 온다는 설정처럼 약간의 각색과 인물 구도의 재배치가 일어나기 했지만 아들의 납치과 기독교인의 포교, 하느님과의 갈등, 살인마에 대한 용서의 문제와 같이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소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용서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이 소설에서 광주에 대한 용서 문제와 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주인의 절망의 문제에 대해서 느꼈다면 「밀양」은 그런 감독의 문제 의식을 좀 더 확장시켰다. 인간사의 용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문제에까지 눈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차차 이야기할 내용이지만 「밀양」은 용서의 문제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신앙적 인간과 속물적 인간, 용서의 주체, 인간 구원의 문제 등 「밀양」이 하고자 하는 내용은 사람이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부딪치게 되는 소소한 그러나 매우 철학적인 내용에 관한 것이다. 그러한 것들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영화는 함께 곱씹어보자고 제안한다. 그야말로 삶과 우리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점에 영화가 소설을 뛰어 넘고 있는 점이다.
소설에서는 하느님에게 배신당한 알암이 엄마가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마무리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마에 대해 자신보다 먼저 하느님이 용서하시고, 그 용서를 받은 살인마는 평온한 상태로 하느님의 품을 돌아간다. 자신이 용서할 수도 그렇다고 증오할 수도 없는 대상이 된 살인마 앞에서 알암이 엄마는 절망에 빠진다. 결국 살인마 김도섭이 형장의 이슬이 된 날 알암이 엄마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절망과 좌절을 스스로 이겨내지도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지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밀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느님의 행동에 좌절과 절망에 빠진 신애는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자살을 선택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고 영화가 끝을 맺는다. 소설과는 달리 신애는 절망과 고통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신애에 대한 구원, 이것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적 내용이며 ‘비밀스러운 빛’의 진정한 내용일 것이다.

하느님과 악마

「밀양」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용서’라는 것과 ‘구원’이라는 것 중 어떤 것을 먼저 언급할 것인가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둘의 관계가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관점에 따라서 어떤 것에 우선권을 둘 것인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선은 두 가지 중심 화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전제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악마와 하느님에 관해서다.
약사는 신애에게 세상의 반을 알기 위해서 하느님 존재를 믿으라고 한다. 비록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기는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애가 먼저 만난 존재는 자애로운 하느님이 아니라 현실의 악마였다. 신애는 아들 준을 잃는다. 준이 다니는 웅변학원 원장이 준을 납치해 살해한 것이다. 세상 만물에 하느님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는 약사의 말과는 달리 신애에게는 현실 속에 악마의 존재를 더 빨리 느끼게 된 것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악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웅변학원 원장은 얼핏 보기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생김새부터 그가 직업으로 하는 학원 일까지 영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정보의 한에서는 평범한 이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라는 말 속에 악마의 함정이 숨어 있다. 악마적 행동을 하지 이전의 학원 원장의 표정은 매우 건조하기 이를 데가 없다. 어떤 측면에서는 세상의 초탈한 것처럼, 또 어떤 측면에서는 세상의 짐이란 짐은 모두 지고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의 행동과 표정에서 왠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낄 수 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평범한 이웃이 악마가 된다. 더 이상 지금의 삶에서는 얻을 것도 느낄 것도 없는 듯이 삶의 일상성과 반복성의 중독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영화가 악마로 지목하는 학원 원장이며 또한 나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학원 원장의 이런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을 잃고 난 이후 신애의 모습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아들을 잃고도 살아가기 위해서 피아노 개인 교습을 다니며 살아가는 신애의 표정에서 학원 원장과 동일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더 이상 지금의 삶에서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다는 표정을 신애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생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살아있기 때문이지 그 이외의 다른 이유는 없다. 딱 틀에 박힌 행동만을 하고 그 속에 감성이 사라진 신애에게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어떻게 보면 학원 원장도 신애도 단지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 양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학원 원장과 같은 처지에 있을 수도 있다. 매너리즘에 빠진 삶 자체가 하나의 구원을 필요로 하는 요소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문제는 누가 학원 원장을 신애를 나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영화가 우리에게 내리는 질문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누가하는가?
학원 원장은 하느님에게 구원을 받았다.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어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았다. 하지만 신애는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다. 신애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한다.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하느님을 증오하며 당당히 싸울 것을 천명하기까지 한다.

신과의 대결

신애를 준을 잃고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나약했다. 아들을 죽인 범인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인간이 되었다. 목숨이 붙어 있어서 살아갈 뿐 삶의 목표도 의미도 없다. 준이 죽은 후 피아노 개인 교습을 하고 있는 신애의 모습은 생동감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넋 나간 사람이었다. 웅변 학원 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느님은 약사를 통해 신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신애는 하느님의 내민 손길을 얼른 잡지 못한다.
햇빛 한 조각에도 하느님의 뜻이 있다는 약사의 말에 신애는 이렇게 답한다.

“여기 뭐가 있어요? 햇빛이에요. 햇빛. 뭐가 있어요. 여기? 아무것도 없어요?”

신애는 그 고통을 스스로 이겨내려 노력한다. 자신을 도우려는 그 어떤 손길도 거부한다. 하느님의 손길도 종찬의 손길도 면사무소 직원이 내면 작디작은 도움의 손길도 모두 거부한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 때 신애의 눈앞에 개척 교회가 들어왔다. 하느님이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신애는 하느님의 품을 느꼈고, 사랑을 느꼈고,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잡았다. 아니, 잡은 줄 알았다.
교회에서 가슴이 미어지도록 흐느끼고 난 이후 신애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었다. 마음의 평화를 얻었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신애가 있는 모든 곳에 하느님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싱크대에서 혼자 묵묵히 밥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어디서나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그녀지만 현실에서의 그녀는 여전히 외롭고 쓸쓸한 존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죽은 아들 생각에 여전히 눈물 흘린다. 성경을 외우면서 하느님을 찾지만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고, 준이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아들을 잃은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채로 신애를 괴롭힌다.
신애는 우연히 자신을 죽인 범인의 딸이 불량배에게 맞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외면한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과 구원을 받은 신애지만 참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불량배에게 맞고 있는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신애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준을 죽인 살인마를 직접 만나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신애는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한 순간에 하느님으로부터의 철저한 배신을 당했음을 느끼게 된다. 신애는 언제나 자신 곁에 있다고 느낀 하느님의 월권 행사에 분노한다.

“하느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를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용서하려한 신애가 그녀의 원수로부터 들은 말이다. 원수의 얼굴은 성자의 얼굴이었다. 세상사의 힘든 고통은 그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 말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얼굴이었다. 신애가 처음 하느님을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온 세상에 하느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 신애는 하느님의 손길에 회의를 느낀다. 준이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은 후 신애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전혀 구원받지 못했으며, 어떠한 치유도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나아가 하느님이 더 이상 자신의 편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애는 분노한다. 하느님과의 대결을 선언한 것이다. 하느님을 말씀대로 살면 구원 받을 줄 알았던 신애 자신은 여전히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정작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할 죄인은 당사자인 신애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를 받고 평온을 되찾은 것에 분노를 느낀 것이다. 하느님이 자신의 믿음을 져버렸다는 생각에 신애는 하느님의 뜻과 정면을 맞선다.
도둑질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그것이 거짓말임을 주장한다. 하느님과의 싸움에서 신애는 결국 지고 만다. 하느님의 설교가 거짓말이라고 할수록 신자들은 더욱더 하느님을 찾았고, 장로를 유혹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게 한 후 “잘 보이냐고?”라고 하늘에다가 외치지만 장로는 결국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 신애는 하느님과의 대결에서 철저히 패배한다.

“난 너한테 안 져. 절대 안 져.”

신애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다짐한다. 하지만 자신을 위한 철야 기도회에 돌을 던지는 것으로 신애의 마지막 몸부림은 끝이 나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패배를 인정하게 된다. 스스로에게 파괴당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외친다. 신애가 찾은 안식처가 하느님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진정한 용서의 의미

신애가 하느님에게 반기를 든 이유는 하느님의 용서 때문이었다. 영화는 용서의 의미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한다. “사람을 죽여 놓고 미안하다고 하면 다요?”라는 말은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알고는 있냐는 반문이다. 진정한 용서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영화에서 준이를 죽인 범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얻었다. 깊은 뉘우침과 기도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신애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가 찬 노릇이었다.

“이미 용서를 얻었는데 내가 어떻게 다시 용서를 해요?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 받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이 지점은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의 문제 의식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사람이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선결 조건이 필요하다. 그로 인해 고통을 얻은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루어진 용서, 하느님이 용서했으니 그만 용서하라는 주위의 부추김은 용서에 대한 진정한 태도가 아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와 관련된 피해자의 관점에서 합당한 수준의 무언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용서와 화합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월권 행위이다. 「밀양」도 이와 비슷한 용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범인은 신애가 인정할 수 없는 수준의 행동만으로 자신의 죄를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 평온한 상태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그의 잘못에 대한 죄값을 치웠다. 범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신애가 불량배로부터 도움을 주지 않았던 그 딸 말이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날 종찬과 함께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간 신애는 그곳에서 그 아이를 만난다. 학교도 그만두고 소년원까지 간 그 아이는 신애의 머리를 자르면서 눈물을 글썽인다. 죄스러움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간에 받았을 그 아이의 고통은 그 아버지의 죄 값 대신이었을 것이다. 신애는 그곳을 피해서 하늘을 쏘아 보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를 대신해 충분히 죄 값을 치울 그 아이를 더 이상 원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단지 하늘에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밀양」은 원작 소설이 던진 질문을 어떤 측면에서는 짓궂고도 잔인하게 답을 내려 준다. 인간 세상에서의 용서란 어떤 의미여야 하는지를 말이다. 인간사에서의 용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가 반드시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 영화가 말하는 용서의 의미다. 「밀양」이 원작을 뛰어넘고 있다는 평가는 단지 용서에 대한 답을 찾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용서의 의미가 영화의 중요한 주제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이다.

김종찬 이야기

「밀양」을 이야기 하면서 송강호가 연기한 김종찬이라는 인물을 빼놓을 수 없다. 종찬은 신애의 옆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고 서 있는 인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종찬은 신애와 대비되는 인물로도 보이며, 또 어떤 측면에서는 신애를 보안하는 인물로도 보인다. 영화 내내 신애와 종찬은 서로 융합되지 않는다. 신애는 모든 일을 특정한 목표와 의지 속에서 행하지만 종찬은 그렇지 않다. 종찬의 삶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태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신애의 입장에서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비밀스러운 빛을 찾아 왔지만 종찬은 밀양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 뜻보고 삶니까? 그냥 사는 거지.” 종찬의 이런 태도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똑같아예, 딴 데하고. 사람사는 데 다 똑같이지예 뭐.”
넉살 좋고, 마당발인 종찬을 신애는 딱 한마디로 정의한다. ‘속물’. 신애가 보기에 종찬은 속물이었다. 하지만 신애의 이런 평가에 쉽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보더라도 종찬은 속물이고 속물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다방 종업원의 치마 속을 들여다보면서 장난치는 종찬의 모습은 세속적인 모습 그 자체이다. 종찬도 신애의 정의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냥 웃고 넘긴다. 속물처럼 말이다.
종찬은 신애를 따라서 교회도 나간다. 누가 봐도 종찬은 나이롱 신자다. 신애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이다. 기차 역 앞에서 교회 사람들과 노래도 부르지만 그 옆에서 친구들과 담배를 피며 수다를 떠는 모습에서 진정한 신앙심이라고는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다. 종찬의 이런 속물적 삶의 태도는 영화 내내 한치도 변하지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에 신애의 동생이 종찬에게 아직도 교회 다니냐는 질문에 종찬은 이렇게 대답한다.

“예, 처음에는 신애씨 때문에 다니게 되었는데, 인자는 뭐 버릇이 돼서 그냥 다닙니다. 안 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맘이 쪼금 편안하고 그렇데예. 허허.”

종찬은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종찬이 교회를 나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며 버릇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도 아니고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냥 습관처럼 버릇처럼 하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을 터이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느덧 종찬의 삶의 일부분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영화에서 보이는 종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옆 사람에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교회에 버릇처럼 나가는 종찬은 속물적인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속물 아닌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종찬을 속물이라고 부르는 신애는 속물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신애야 말로 지극히 속물적인 사람이다. 종찬이 피아노 학원에 걸어준 가짜 상장을 그대로 걸어둔다. 그리고 동생에겐 그것이 진짜가 아닌 가짜라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 또 신애는 낯선 곳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돈이 많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애의 아들, 준의 납치의 빌미를 제공한다. 신애 역시도 세상사를 속물적인 태도로 살아가고 있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영화 속에는 종찬, 신애 이외에도 많은 속물적인 사람들이 등장한다. 연애 하고 싶어서 교회 나가겠다는 사람, 제사 안 모시려고 교회 나가려는 사람 등 신애 옆에는 속물들이 많다.
속물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속물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영화 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속물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밀양」이 말하려는 누구로부터 구원 받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은 속물성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단적으로 속물의 상징인 종찬은 끝까지 신애 옆을 떠나지 않는다. 신애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개의치 않고, 신애 옆에 있는다. 신애가 장로를 시험에 빠뜨리는 데 실패하고 종찬을 시험에 빠뜨리려고 할 때 속물인 종찬은 오히려 신애에게 처음으로 화를 낸다. 역설적이게도 속물이 신애의 완전한 파멸을 막아준 것이다. 미쳐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도, 퇴원 할 때도 종찬은 항상 신애 옆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종찬은 신애에게 있어서 어디에나 함께하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속물인 종천이 말이다.
신애가 병원에서 나와 다시 밀양에 돌아왔을 때 그녀를 맞이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제들이 아니라 옷가게 주인이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웃는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신애의 구원을 받았고, 상처가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애는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스스로 밀양에 왔듯이 앞으로도 스스로 삶을 끌어나가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종찬은 어김없이 그런 신애 옆에서 그녀를 돕는다. 결국 신애를 구원하고 상처를 치유한 존재는 하느님이 아니라 종찬과 같은 속물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존재 역시도 종찬과 같은 속물, 우리의 이웃인 것이다.
사실 김종찬이라는 인물은 신애를 보호하고 구원하는 인물로 나오지만 성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종찬은 가족들과 끊임없이 대립한다. 사실 종찬의 가족사는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요소다. 그럼에도 종찬과 그 가족의 대립을 영화 중간 중간에 삽입해 넣은 이유는 그는 성자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다. 종찬은 성자가 아니라 속물 근성을 가진 이웃에 불과하다. 나를 구원하고 지켜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내 옆에 있는 사람이며, 그 사람은 결코 성자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를 구원할 수 있는가?

김종찬은 완벽한 인물이 아니다. 옷가게 주인도 완벽한 인물이 아니다. 주위 사람 모두를 사랑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화내고, 적당히 웃고, 적당히 뒤에서 욕도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대부분의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정해진 규칙 위에서 행동하고 살아갈 뿐이다. 어떤 면에서 자신이 따르고 있는 규칙을 침범 당할 경우 그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한다. 신애가 밀양으로 내려와 개업 인사를 다닐 때 옷가게 주인에게 인테리어에 대해 충고를 하지만 가게 주인은 그런 신애의 행동을 곱지 않게 바라본다. 신애가 없는 줄 알았던 미용실에서 신애를 험담한다. 신애에게는 그렇게 착하고 신애를 위해서는 모든 걸 줄 것 같은 종찬도 커피를 배달하는 아가씨에 대해서는 존중과 배려라는 단어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이런 사람들이 상처받은 신애를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단호하게 말한다. 신애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미혹하고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신애는 신의 능력에 도전했고, 완전히 패배했다. 영화는 신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용서와 구원의 남발에 대한 신애의 분노는 신이라는 존재의 허구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다만 영화는 사람의 삶에 있어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영역에 대한 긍정의 측면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를 혹은 내 옆 사람의 삶을 같이 공유하고 만들어 나간다. 사람이 사람을 구원의 목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종찬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뜻을 보고 살지 않는다. 사람 사는 데 특별한 건 없다. 우리는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신애가 치유 받고 구원받았음을 알려주는 옷가게 주인과의 대화 장면은 이를 그대로 말해준다. 옷가게 주인은 고통 받는 신애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종찬도 사실 신애를 위해 특별히 한 것은 없다. 그냥 옆에 있기만 했을 뿐이다.
이것이 영화가 말하는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다. 동시에 하느님이 사람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 만물에 하느님의 뜻이 깃들어 있기는 하지만 정작 그 만물을 공유하는 대상은 하느님이 아니다. 언제나 말동무가 되어주는 사람, 내 옆에 있는 사람, 바로 사람들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으며, 존재자체가 바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성자의 것과 속물적인 것이 공존하는 존재,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완전한 존재가 그 존재가 영화가 말하는 밀양은 아닐까?

비밀스러운 빛, 밀양

영화는 신애가 종찬의 도움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잘려진 머리카락이 마당의 한 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의 제목처럼 비밀스러운 빛 한줄기가 그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 마당 한구석은 어느 누가 보더라도 영광스럽거나 신성한 장소가 아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찮고 볼품없는 그런 곳이다. 신애의 잘려진 머리카락은 굳이 그런 곳에 자리를 잡는다. 비밀스러운 빛도 그곳을 비춘다.
신애가 머리카락을 스스로 자른 것은 과거로부터의 해방의 의미와 새로운 삶에 대한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확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종찬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다. 힘들게 잘라낸 신애의 일부분은 다시 멋지고, 좋은 곳이라고 보기 힘든 마당으로 바람에 날려 간다. 결국 신애가 구원받고 극복한 곳은 성스럽고 축복받은 곳이 아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루하고 평범한 곳, 신애의 일상을 뿐이다. 그녀는 상처받고, 고통받은 공간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구원을 받기 전의 장소도, 구원의 장소도, 구원 후의 장소도 동일하다. 그러나 그곳은 암울하거나 어두운 곳이 아니다. 비밀스러운 빛이 어김없이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비밀스러운 빛은 전지전능한 신일 수도 있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속물들일 수도 있다. 물론 영화가 말하고 싶은 빛은 후자일 것이다. 어디서나 느낄 수 있지만 그 존재 자체를 모두 알 수 없는, 비밀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들인 우리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비밀스러운 구원을 행하고 있다고 말이다.
세상에 고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죄를 짓기도 하고, 그 죄를 용서하기도 한다. 상처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것도 사람이다. 용서에 진정한 의미와 사람에 대한 구원의 원천을 찾고자 한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이렇듯 간단하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용서하고 구원할 것이다. 신애는 처음부터 자신의 힘을 따라왔다. 고통의 땅이 밀양으로 내려온 것도 신애의 결정이었고, 하느님에 반기를 든 것도 신애의 결정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것도 신애 스스로가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는 신애는 미처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녀 혼자만 있지 않았다. 비밀스런 빛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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