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효경


“어느 날, 네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나도 그렇다는 걸 기억해 줄래?
너하고 나, 쌍둥이나 마찬가지니까.” 『통역사』


오늘날 ‘한국 문학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 최근 국내 기성 작가들의 작품도 더 이상 한국과 한국인만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재일교포들의 경험을 쓴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나 재미교포 이창래의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 등이 국내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현상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문학은 한국 사람이 한글로 쓴 문학’이라는 일견 느슨한 정의는 계급, 인종, 성별 등 차이의 정치학이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 단일한 집단으로서의 ‘한국 사람’이라는 범주가 문제시되는 것처럼,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한글로 쓴 작품만이 한국 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한국에서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인정받는 신춘문예나 각종 문예지 작품들은 그 심사 대상을 ‘한글로 쓰여진’ 작품에 국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다양한 문화권에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주로 영어)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모국어로 쓴 작품만이 그 나라의 문학이란 식의 주장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갈 것이다. 물론 나는 이 글에서 국제 경쟁력을 위해 한국어를 폐지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대체하자는 복거일식의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 사회에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가고 전 세계 곳곳에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 한국 문학의 범주를 생각해 보는 일은 한국 문학의 고유성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다양성과 의미를 확장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 글은 한국 문학과 언어의 문제를 재미교포 2세, 수키 김의 『통역사』(2005 황금가지)를 통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최근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비교 문학을 활성화시키거나 아예 각 언어별로 분류된 과들을 ‘문학과’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지만, 여전히 문학 작품 연구는 그 작품이 쓰여진 언어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탈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은 자신의 모국 인도 여성들이 쓴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하여 서구에 소개하면서 탈식민주의 문학론을 주장하였다. 영어라는 제국주의의 소산물이 오히려 서구 중심적인 정전을 해체하고 그 속에 타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게 했던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특히 영어로 작품을 쓰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작가들의 경우,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전통적인 의미의 ‘영문학’이라는 범주에 포함되기를 거부하고 전략적 도구로서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태혜숙은 이런 현상을 가리켜 ‘제국’과의 접촉에 의해 제국의 언어를 익힌 제 3세계 지식인들이 제국의 언어를 전유해 새로운 형태의 문학에 도전하고 있다고 본다(17).
제국의 언어를 전유하려는 전략이 오히려 다양한 언어들의 특수성 제거하고 획일화된 미국화(Americanization)로 귀결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고 이는 일견 타당하다. 서구에서 인정을 받는 작품들 중 많은 수가 서구인들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된 오리엔탈리즘을 투영하는 작품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이샤의 추억』(Memories of a Geisha)이나 『인도차이나』(Indochina)와 같은 작품들은 신비한 동양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서구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아시아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작품을 바라볼 때 그런 작품들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아시아에 대한 대상화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하듯이 제 3세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미개’하지만, 유혹적인 이미지로 그려지는 현상은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최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존 M. 쿳기(2003년 수상)나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1993년 수상) 등 비교적 다양한 비서구 문화권 작가들에게 수상의 기회를 부여한 노벨상 역시 여전히 영어로 번역된 작품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특히 일본 치하에서 식민지 경험을 했고 급속한 근대화에 대한 대안으로 민족 담론을 부각시킨 한국 문단에서 ‘한국을 다룬’ 영어로 쓰여 진 작품이 한국 문학에 포섭될 수 있다는 주장은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백낙청은 「민족문학 이념의 신전개」(1974)에서 “민족문학 개념을 외면하는 것은 민족의 생존과 존엄에 대한 현실적 도전을 망각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렇듯 한국의 민족문학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제 3세계의 실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수 있다. 한국 문학은 그 자체로 저항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날이 파편화되어가는 차이의 정치학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토대와 정체성을 확실히 아는 것이 추상적인 ‘우리’를 주장하는 것보다 근본적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또 특정한 민족의 정체성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쓰여 져야 하기 때문에 확실히 ‘한글로 쓰여 진 문학’이란 한국 문학의 범주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언제나 타자에 대한 발견과 맞닿아 있다. 이상갑은 1970년대 민족문학론에 관한 논쟁을 다룬『근대민족문학비평사론』에서 “한국의 민족문학담론은 자기 민족의 가치를 절대화하며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폐쇄적인 자민족 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39)고 주장한다. 자기 민족의 가치를 절대화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이 두 가지 모순되는 정체성이 가장 극명하게 충돌하는 지점에, 이민자 문학이 있다.
모국어와 한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의 문제를 가장 강하게 다루고 있는 문학 작품은 바로 항상 타자들을 접하며 자신이 누군지를 고민해야 했던 이민자들의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타자와의 차이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깊게 고민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들 문학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따라서 이민자들의 고민은 자신의 것만을 고집하는 폐쇄주의와 주체성을 잃은 세계화라는 이분법적인 입장을 넘어서서, 인종과 민족에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다.
최근 구소련권에서 고려인들의 문학을 연구한 『억압과 망각, 그리고 디아스포라』(2004)에서 한 고려인 문인은 한국어로도, 러시아어로도 작품 활동을 하기 그들의 중간자적인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양원식: [한국에서 쓰는 말과 고려인들의 말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 . . 사실 고려인 문인들이 사용하는 글은 러시아 말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언뜻 보면 러시아어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 속에 고려인들의 개성이 묻어 있다고 봅니다. 고려인들이 한국 사람같이 말하면 그건 고려인이 아니라는 게 저의 입장입니다. (「재소 고려인 문학의 특징과 발전 방향」 인터뷰 377)

이처럼 고려인 문학가 양원식은 자신의 작품을 한국 문학에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으나 고려인들의 언어가 한글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언어가 한 민족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할 때 모국어를 박탈당한 채(혹은 스스로 포기한 채) 타자의 언어를 구사하기를 요구받는 이산(diaspora)의 문학, 이민자들의 문학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민족의 문제에 접근한다. 그들이 하는 작업은 바로 차이를 섣불리 차별과 동일시하지 않고,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며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다.


2.

한국에서 흔히 ‘이산’(離散)으로 번역되는 ‘디아스포라’(dispora)는 어원적으로 그리스어 전치사 'dia'(〜을 넘어)와 동사 ‘spero’(뿌리)가 결합되어 ‘뿌리를 넘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유랑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다가 1990년대에 유대인의 경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국제이주, 망명, 이주노동자, 문화적 차이, 민족 공동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윤인진 5).
디아스포라의 정의는 물리적 및 지리적으로는 한 민족사회에서 떨어져 나왔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자민족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공존하고 있는 실험장이다. 그 중에서도 수키 킴의 소설 『통역사』(2003)는 이민 2세대의 입장에서 두 개의 문화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두 개의 문화를 모두 경험하는 이민자들은 두 개의 언어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소설은 주인공 수지가 부모님 살해에 관련된 미스터리를 추적해 나가는 과정을 큰 줄기로 삼아,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과 소통 불능의 상태 등을 섬세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LA의 한인 타운에서 가게를 경영하는 수지의 부모가 왜 살해당할 수밖에 없는 지를 추적해가는 추리 소설의 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수지는 부모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을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혼란한 정체성에 대한 해답도 찾으려 한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두 축으로 삼아, 한인 부부가 살해당하기 전 그들의 과거를 한 축으로, 백인 교수와 불륜 관계를 맺고 가족에게 의절당한 채 통역에 의지해 삶을 꾸려가는 수지의 현재를 또 다른 한 축으로 삼고 있다. 과거와 현재는 교묘하게 얽혀있고 그녀는 자신이 너무 어려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비밀, 빛나는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를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수지는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위치를 다시 묻는다.
수지의 아버지는 한국에서의 삶에 절망하고 아메리카 드림의 꿈을 안은 채 미국 이민길에 오른 이민 1세대이다. 세계의 경제 대국 미국에서도 제 3세계 이민자들의 삶은 대부분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것이 이민 초기라면 더욱 그렇다. 최하위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백인들의 사회에서 명백한 소수자들이다. 법적으로는 제 1세계인일지 몰라도 언제나 사실은 제 3세계인임을 염두에 둔 채 살아가야 하는 이민자 사회의 실상은 끔찍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아메리칸 드림이 시작되는 곳은 공항이라고 하더군. 누가 마중을 나왔느냐에 따라서 모든 게 달라진다고. 세탁소를 하는 사촌이 마중을 나오면 세탁일을 베우는 거고, 회를 떠 주는 형제가 나오면 또 그 일을 하는 거고. (240)

조국을 등지고 아무도 아는 이 없는 타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이들에게 ‘선택’이란 사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민자들은 미국이 그들의 ‘적법한’ 시민들을 위해 이민자들의 한시적 거주를 허락해 준 대가로 요구하는 일을 해야만 한다.
『통역사』는 언어가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제 1세계는 이민자들에게 결코 빛나거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 곳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뭉쳐야 한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그들은 제 1세계에서 언제나 죄인이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기대야 하며 조금이라도 먼저 정착한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그 사회의 룰을 다시 설명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민자 사회는 지독하게 폐쇄적이고 위계적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그곳에서 미래를 그리고 꿈을 꾼다. 적어도 그곳에서 그들은 ‘언어’의 권력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달할 수 있고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권력으로 돌변하는 곳, 그것이 타자의 삶이다. 타자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를 가질 수 없다. 그들은 설명될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이민자 사회에 속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인으로서 교육을 받은 수지와 언니 그레이스에게 아버지와 같은 한국에 대한 애착이 없다. 아버지는 딸들이 한국식 가정에서 한국식으로 살기를 원한다.

모국어를 잊어버리면 안 돼. 모국어를 잊어버린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이야. (72)

불법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초라한 가장에게 한국은 그의 모국이자 동시에 자신이 등지고 떠나온 고향이며, 딸들에게 유일한 아버지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이었다. 즉 그는 한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며 아버지로서 얄팍한 위엄을 지켜갈 수 있었다. 수지는 이런 아버지의 강압적인 방식이 너무나 싫었지만 아버지의 강요로 익힌 ‘모국어’ 덕분에 통역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통역사’(interpreter)는 두개의 문화를 접하고 두개의 언어를 알고 있지만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수지, 그 자체를 상징한다. 그녀는 주로 이민법을 어긴 한국인들을 취조하는 이민국 검사의 통역을 맡는다. 통역사는 마치 중립을 자처하는 법관처럼 자신을 구성하는 두 가지 정체성,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객관적’인 위치에 있고 싶어 하는 수지의 욕망을 반영한다.

수지는 지방 검사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요한 단어를 수첩에 적는다. 통역을 할 때는 아무리 문장이 길더라도 모든 단어를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 통역사는 수학자하고 비슷하다. 그녀는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언어를 대한다. (143)

통역사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 어느 한쪽 편에 서는 순간,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거나 분노를 터뜨리는 법 없이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옮겨주던 가느다란 실이 끊겨버린다. (447)

수지는 그녀의 아버지가 원한 것처럼 완벽한 한국인이 될 수 없었지만 백인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도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중립적 입장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다. 그녀는 마치 통역사와 같이 어디에도 감정이입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지는 어느 쪽도 온전히 얻을 수 없다면,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현실은, 사람들이 살아내야만 하는 잔인한 현실은, 결코 하나의 단어를 똑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로 옮기는 통역처럼 중립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넘어 그 행간에 무한한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삶을 마주하는 인간은 그 누구도 중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아무리 맨주먹으로 아메리칸 드림에 성공한 한국인이라도 백인들의 사회에서 주류는 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죄를 지은 것처럼 법 앞에 무력하고 이민국의 소환에 지레 겁을 먹는다. 살아남기 위해 먼저 온 자들은 나중에 온 자들을 팔아넘기고 또 그렇게 속은 자들은 더 나중에 온 자들을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착취하며 배신한다. 아시아 이민자들은 백인 사회에서 그들의 피부색으로 인해 항상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러왔다. 소설의 작가 수키 김이 어느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하지만 교포라는 의식은 자꾸 와요. 미국에서도 내가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은 늘 있어요. 피부는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사실이니까요.”라고 밝힌 것처럼 동양인이란 낙인은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수지는 우연히 이민국 법정에서 맡게 된 사건에서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알고 있는 김용수의 진술을 통역하면서 부모에 얽힌 죽음을 추적해나간다. 김용수에게 얻게 된 실마리를 바탕으로 수지는 퍼즐의 조각을 하나씩 맞추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는 부모님이 잔인하게 살해당해야 했던 진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불법 이민자들을 자신의 가게에 고용해 착취하고 이민국에 신고해 강제 추방하게 하는 것으로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로소 수지는 친절했던 가게 아저씨가 어느 날 돌연히 사라진 이유와 어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하나 뿐인 언니 그레이스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이민국에 동포를 고발하는 것을 통역해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수지는 결국 중립을 지키고 있던 통역사의 위치를 스스로 놓아버린다. 실타래처럼 얽혀져있는 모든 잔인한 운명들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동포를 팔아넘겨야 했던 아버지와 그 아버지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고 도피 중인 또 다른 이민자들의 삶, 수지는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통역사인 수지의 눈에 언제나 심판을 하는 것은 백인들, 심판을 당하는 것은 죄인처럼 앉아서 벌벌 떨고 있는 한국인이었다.

미스터 리는 몇 사람의 이름을 늘어놓는다. 조르주, 루이스, 로베르토, 모두 남미 출신의 이름들이다. 여기에서도 위계 질서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백인 검사, 한국인 상점 주인, 남미 출신 종업원. 수지는 언어를 유일한 방패삼아 어중간하게 끼어있다. (149)

소설의 결말에서 수지는 자신이 중립을 지킬 수 없는 통역사였음을 시인한다. 그녀는 비록 오롯이 자신의 것은 아니었더라도 이민자 사회의 비정함을 부모님을 통해 똑똑히 지켜봐왔다. 너무나 싫지만 결코 떼어버릴 수 없는 꼬리표인 제 3세계인. 가난하니까 서로를 배신하고 살아남기 위해 남을 억압하는 이 괴로운 쳇바퀴의 원인이 그들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수지는 깨닫게 된다. 아메리카 드림을 믿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순진하게 믿었던 사람들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백인들이 먹고 남긴 먹이를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타자로서 출발한 그들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타자의 위치를 벗어날 수 없었고 성공이란 달콤한 환상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수지의 혼란과 그녀가 내린 마지막 결론은 오늘날 디아스포라 문학이 가진 모호하고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준다. 아버지만큼 조국애를 느낄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백인 사회에 완전히 편승하지도 못하는 수지의 이중적인 정체성은 경계에 선 이민자들의 상태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지는 결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미국과 같은 다문화 사회가 더 이상 모든 정체성을 하나로 섞어버리는 ‘멜팅 폿’(melting pot)이 아니며, 다양한 재료들이 섞이지만 결코 융합되지 않는 ‘샐러드 볼’(salad bowl)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지에게 아시아인으로서 부여된 정체성은 지리적 위치를 넘어서 똑똑히 새겨져 있다. 따라서 아시아 이민자라는 수지의 위치는 강대국의 제국주의적인 논리 앞에 저항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해야 하는 제 3세계 사람들의 그것과 닮아있다. 수지의 목소리는 거대한 서구 주류 사회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들만의 사회’에 균열을 내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작품을 한국문학이라고 명명하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이 작품의 1차적 독자가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오히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국의 민족성을 참신한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아시아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영어로 글을 쓰는 행위를 제국주의 권력의 언어를 빌려와 전유하는 행위이며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민 2세였던 차학경이 그녀의 작품의 제목을 불어로 ‘받아쓰기’를 뜻하는 ‘딕테(Dictee)’라고 붙이고 이중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수지가 ‘통역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행위는, 제 3세계인들을 제국주의적 담론의 주변부로 남게 한 언어의 문제가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자들의 논리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녀들은 제국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받아쓰고,’ ‘통역하는’ 과정에서 자신들과 ‘모국’과의 연계성을 찾고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어로 글쓰기는 그 자체로 한국 문학이 세계문학과 관계 맺는, 그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포섭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독자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민자 문학의 복잡성은 그들의 작품이 다양한 층위의 독자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작가는 일차적으로 자신을 소외시켰던 미국 사회에 한국과 미국의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의 위치를 주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한국의 문화를 미국 사회에 ‘설명’해야 한다. 또 작품이 ‘번역’을 거쳐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해지기도 한다. 이처럼 이민자 문학은 모든 독자들에게 동일한 의미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이미 다양한 위치와 독자의 대상을 통해서 다층적인 의미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녀는 집에서나마 한국말을 계속 썼다. 그리고 한국의 풍습을 따랐다. 하지만 문화를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달랐다. 그녀는 어른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면서도 공경하는 뜻을 담지 않았다. 시큼한 김치를 입에 넣으면서도 김치에 얽힌 슬픈 역사는 알지 못했다. ... 그런데 집을 떠난 뒤로 알게 된 미국 문화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추수 감사절 만찬, 에그노그, 「메리 타일러 무어 쇼」. 모노폴리. 닥터 수스, JFK. 이와 같은 상징들이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267)

수지의 과거를 회상하는 위 문단은 한국과 미국의 문화를 선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이 구절을 읽은 독자가 미국인이었다면 그는 한국의 문화를 다룬 앞부분을 낯설게 느낄 것이고 반대로 한국인이었다면 미국의 문화적 아이콘을 나열한 뒷부분을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작품은 곳곳에서 독자의 위치를 교란시키며 독자에 따라 각주조차도 달라져야 하는 서술의 구조를 갖는다. 위치에 따른 의미의 재확장은 소설의 맥락을 더욱 풍부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타자의 이야기는 어느새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나의 이야기라 생각했던 것은 타자의 이야기가 된다. 한국인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은 내가 어떤 위치에서 이 소설을 보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지각’하게 만든다.

박카스. 정말 오랜 만에 들어보는 단어이다. 박카스는 차이나타운의 호랑이 연고만 한 만병통치약이다. 숙취와 소화 불량 등 속이 안 좋을 때 마시는 물약이다. 아빠가 간밤에 마신 소주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마다 엄마는 수지를 약국으로 보내 박카스 한 상자를 사오게 했다. 한인들이 운영하는 약국은 약을 그냥 내주는 이상한 곳이었다. 그들은 처방전을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처방전이 필요한 약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제 3세계 국가의 묵은 관습이었다. 한국은 제3세계라는 신분을 벗어난 지 오래지만 사람들은 툭하면 항생제를 찾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엄마만 하더라도 감기에서부터 염증에 이르기까지 온갖 병에 마이신을 썼다. 불합리하지만 슬프도록 낯설다. (325)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풍경을 수지는 자신의 경계적 위치로 인해 그것의 낯설음을 감지하고 그것을 미국 독자들에게 영어로 전달한다. 이런 낯설게 하기(defamilarization)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데서 그 의의가 있다. 인용한 부분은 한국의 문화에 지식이 없는 미국인 독자들을 일차적인 독자로 상정하고 있지만,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문화적 거울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불합리하지만 슬프도록 낯선’ 수지의 입장을 지켜보는 한국 독자들은 수지의 시선으로, 그리고 그 수지의 시선을 지켜보는 독자의 시선으로, 마지막으로 한국인인 자신의 시선으로 하나의 구절을 다층적으로 읽게 된다. 이처럼 영어권 독자들에게 영어로 가장 한국적인 내용과 민족성을 풀어내는 이 소설은 그간의 한국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의미를 생성해낸다.

3.

결말에서 소설은 혼란한 위치의 이민자들에 대해 어떤 뚜렷한 대답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부모가 살해당한 진실을 마주하고 미국이란 거대한 꿈의 제국을 살아가는 소수자들의 현실을 알아버린 수지는 외톨이가 되어 세상에 홀로 서야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그녀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진실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어느 문화에도 속할 수 없는 자신의 불안전함을 그대로 마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상실과 결핍이 아닌, 수지, 자신을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처음부터 경계선은 또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사방의 경계선 안에서 두 소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아무리 많은 남자를 유혹해도, 아무리 많은 남편을 가로채도, 아무리 많은 신을 섬겨도. 어느 날 아침에 일터로 나간 부모님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기 전에는 길을 찾지 못했다. (370)

작가는 수지라는 중립을 가장했던, 혹은 중립적일 수밖에 없었던 분신을 내세우며 질문을 던진다. 두개의 문화를 접하고 두개의 언어를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경계에 선 이민자 사회, 그들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라는 작품이 던지고 있는 큰 질문은 한국 문학의 범주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두 개의 문화를 접해야 하고 두 개의 언어에 능통해야 하는 것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모든 제 3세계인들에게 던져진 고민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추상적인 화합을 논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방식의 정체성의 형성일 것이다.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차이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여전히 한국문학의 범주는 유효한 것이며 한국어는 그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이민자 문학과 같이 다른 각도에서 다른 목소리로 한국을 사고하고 한국 사회를 조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질적인 언어들 간의 충돌은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를 잠식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언어들이 번역되고 새롭게 해석되는 가운데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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