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많은 농담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농담을 건네지도 않고 근엄하게 말하기를 좋아하며, 심지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농담한 사람을 무안하게 한다. 나는 그들이 일부러 못알아들은 척해서 농담하는 사람에게 무안을 주고, 그래서 농담을 세상에서 멸절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농담이다.

 


항상 농담만 하는 사람이 농담을 하면 사실 별로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농담이 아닌 그 농담하는 ‘사람’이 우스워보인다. 진정한 농담은 이런 것이다. 농담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장소에서 하는 농담. 진정한 농담에 관한 훌륭한 예를 나는  얼마전 불문과 홈페이지에서 발견했다. 불문과 홈페이지 ‘대학원 마당’란에 한 수험생이 질문을 올렸다. “이번에 불문과 석사 과정에 진학하려는 사람입니다. 작년 경쟁률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조교님,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조교는 짧게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답변에 최선을 다하는 불문과 조교입니다. 제가 올 해부터 조교 업무를 시작한 관계로 작년 경쟁률은 모르겠습니다.”

 

농담의 가벼움이 근엄하게 말하기의 무거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나는 농담을 해도 되는 사람이 농담을 해도 되는 장소에서, 근엄한 척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이 한없이 재미없어 진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도사인 척하는 시인들, 뭔가 깨달음을 전하려고 드는 시인들은 재미없는 족속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깨달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경전으로도 충분하다. 시의 임무는 공자의 깨달음과 자신의 삶 사이의 간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4?9세대의 비평가가 이미 선언해놓았지 않은가. 그 간극에 대해 괴롭게 말할 자신이 없다면,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시보다는, 오히려 좀 유치해도 가볍게 말하는 시가 성공할 때가 많다. 김경미의 「야채사(野菜史)」를 보라.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맛없었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꽃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꽃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

 


이 시에도 ‘시학’같은 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아닌가?’ 전략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인이 뭐라고 말했다가 뒤통수를 긁으며 ‘아닌가?’하는 표정이 보이는 듯 하다. 이 시인은 뭔가 고결한 깨달음을 전하려는 듯 하다가 “아니∼이었다던가”라고 눙치고 있어서 즐겁다. 심지어 3연은 “여하튼”으로 시작하고 있다. 시인은 이 깨달음 선언의 논리구조에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다고, 저 “여하튼”에 못박아 두고 있다. 그 못이 귀엽다. 너무 귀여워서, 사실 이 시인은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는 데도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하고 머뭇머뭇하는 데다가 대고 “응. 그려. 자네 말이 맞네”하고 만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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