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언어의 유곡(幽谷)

▲ © 강동환 기자


내 서재에서 자랑하고 싶은 책 한 권을 고른다면,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白鹿潭)』(1941) 초판본을 뽑을 것이다. 이 책을 청계천 헌책방에서 구한 것이 30년 전 일인데, 그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 같다. 시집 『백록담』의 표지에는 노란 바탕 위에 나무 사이로 사슴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 옆에 환상처럼 날고 있는 나비 한 마리. 『백록담』을 펼쳐들면 이 시집을 구했을 때 느꼈던 그 벅찬 기쁨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 시집을 넘겨볼 때마다, 나는 시인 정지용 특유의 언어적 조형성에 탄복한다. 정지용 시를 읽는 즐거움, 그것은 바로 이 언어의 유곡(幽谷)을 따라가는 조바심에서 비롯된다. 정지용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는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렵다.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언어 감각은 시적 대상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는 생활 속에서 체험의 진실성에 가장 잘 부합될 수 있는 일상어를 그대로 시의 언어로 활용한다. 이러한 언어를 바탕으로 『백록담』의 시들은 감정의 절제와 정서의 균형을 그 시적 공간 속에서 실현한다. 그는 주관적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면서 사물과 현상을 순수관념으로 포착하여 이것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사물에 대한 고정된 감각과 인식을 모두 해체시켜 새로운 미적 감각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정지용의 시에서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균제미(均齊美)가 시집 『백록담』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장수산」이나 「백록담」과 같은 작품을 보면, 하나의 새로운 미적 공간이 다채로운 시적 심상의 결합을 통해 창조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정지용이 체득하고 있는 은일(隱逸)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정지용의 시적 태도가 지나치게 소극적인 세계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고 폄 하할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현대시가 도달하고 있는 정신적인 성숙의 경지를 정지용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백록담』은 시적 발견으로서의 자연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담고 있다. 물론 정지용 이전에도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한 경우는 허다하게 많이 있다. 시를 통한 자연의 발견이라는 명제를 정지용의 경우 유별나게 문제 삼게 되는 것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노래하는 방법이 그 이전의 서정시와는 본질적으로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용이 일체의 주관적 감정을 억제한 채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관조하면서 만들어낸 이 새로운 시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와 동화하거나 합일화하기를 소망하였던 전통적인 자연관을 벗어나고 있다. 정지용은 오히려 자연과 거리를 둠으로써 거기에 그렇게 존재하는 자연을 새롭게 발견한다. 자연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대상화하면서 그것을 소묘적 언어로 재구성하고 있는 그의 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미적 공간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백록담』을 보면서 정지용의 시에 감탄하다가도,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똑같은 표지의 요즘 시집들에 대해 불만이다. 더구나 동일한 디자인으로 구성된 표지의 시집들처럼, 그 속에 담긴 시의 목소리까지 서로 닮아가고 있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게 역겹다.

권영민 인문대 교수ㆍ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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