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권과 제헌권력, 사문화된 관념어에 대한 아감벤과 네그리의 재조명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은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민주공화국의 제1원리인 국민주권 원칙의 표현이기 때문에, 독재정권도 민주화 이후의 정권도 모두 이 원리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 원리가 현실 정치에 갖는 영향력에 대해 의심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국민주권이나 제헌권력과 같은 개념은 교과서에만 등장하는 관념에 불과한 것일까? 여기 두 사람의 현대 정치철학자(조르지오 아감벤과 안토니오 네그리)가 이 사문화된 것처럼 보이는 ‘주권(主勸, Sovereignty)’ 개념을 문제 삼으면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그들은 홉스와 로크가 그랬듯이 주권과의 치열한 지적 대결을 통해서 근대성이 후퇴하고 있는 ‘제국’ 시대의 정치적 주체를 발견하고 개념화하려 한다.

 

주권이란 본질적으로 생살여탈권, 우리는 모두 수용소에 있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주권 권력과 헐벗은 삶(한글 번역본에서는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부제가 보여주고 있듯이 명시적으로 ‘주권에 직면하고 있는 인간의 정치적 실존’의 문제를 중심주제로 삼고 있다. 아감벤에게 주권은 서구 정치의 전체 계보를 관통하는 가장 본원적인 관계이자 권력이기 때문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처럼 어떤 지위를 통해 그 소유권을 나타낼 수 있는 추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주권은 가장 고전적인 형태인, 군주와 가부장이 행사할 수 있는 최고 권리로서의 “생살여탈권”인데, 중요한 것은 주권의 소유자가 아니라 주권 행사의 조건과 방식이다. 슈미트의 결단주의(Dezisionismus) 헌법학은 “비상사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가 주권자”라고 말하는데, 결단주의의 옹호자들이 주권자의 인격적 결단에 주목하는 반면, 아감벤은 주권적 결단이 반드시 비상사태를 전제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주권자의 결단이란 모든 기존의 법이 무력화되는 급박한 상황에서만 진정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단이란 본질적으로 주권에 복속되는 인간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이며 현대의 주권자는 자신이 통치하는 주민의 어느 부분이 죽어야 하고 어느 부분이 살아야하는지를 결정한다. 결국 이러한 비상사태에서 주민 전체는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주권자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어떤 권리나 능력도 허용되지 않는 ‘헐벗은 삶’이 된다.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와 히로시마의 핵폭탄은 현대 정치권력이 그 극단에서 자신의 주권적 성격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본보기인 셈이다.

비상사태가 단순히 극한 상황이 아니라 국가의 법치가 실패하게 되면서 국가 자신이 자발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주권에 자리를 내주게 되는 그러한 공간이라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난민과 무국적자들은 단지 무정부상태의 불확정성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처럼 국가와 법이 자발적으로 직무를 유기한 상황에서 주권의 폭력에 완벽하게 노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아감벤의 논의는 무엇보다 서구의 정치적 유산이 완전히 파산했음을 선언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국가나 법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 자유는 단순히 방종이나 무질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든, 혹은 국가(의 법적 규제)가 물러남으로써 시장의 자유가 가능하다거나 혹은 사회의 자발적인 연대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든 ‘진정한 자유는 법의 침묵에 그 근거를 둔다’(홉스). 그러나 비상사태는 법이 침묵해도 인간의 본원적인 자유가 시작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자유가 희생되었는데도 법이 보장하는 권리가 효력을 발휘하지도 않는 극도로 폭력적인 중간지대다. 아감벤은 우리 모두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던 사람들, 혹은 관타나모 수용소의 억류자들, 그리고 남반구의 수많은 가난한 인구와 다른 정치적 운명에 처해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런 우리에게 주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선택적이고 상대적인 거부가 아니라 허먼 멜빌의 단편 「바틀비」의 주인공인 필경사 바틀비처럼 모든 명령에 대해 거부하는 행위라고 본다.

 

제공: 로이터통신

다중은 어떻게 자유를 쟁취하는가? 제헌권력의 직접적인 행사를 통해

이미 『제국』을 통해 국가가 제국이라는 전지구적 주권 체제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주장한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을 통해 주권에 진정으로 대항할 수 있는 민주적 정치 주체는 '헐벗은 삶이 아니라 다중'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아감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상황에서 급진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사고하기 위해서 주권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중은 바로 이 대결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혁신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다. 다중은 진정한 차이의 담지자로서, 인민이나 국민, 혹은 계급과 같은 통일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사실 다중은 고전적 정치 사상가들에게는 엘리트와 대립하는 가난한 피치자를 가리키는 범주였는데, 이 다중의 자유가 곧 민주 공화국의 조건이자 목표였다. 예컨대 마키아벨리는 다중이 자유로운 곳에서는 공화국이 적합하며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군주국이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중의 자유란 무엇이며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 우선 그것은 ‘지배받지 않을 자유’다. 이와 같은 다중의 자유는 결코 단순히 간섭과 강제를 거부하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의 평민 계급이 도시로부터 철수하면서까지 원로원과 대립함으로써 이 자유를 지켜냈고, 이는 결국 공화국의 ‘좋은 법과 제도’의 원천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네그리에게서도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주권에 대한 거부는 강력한 정치적 힘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때 거부는 단순히 주권의 해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권과의 대립 속에서 ‘좋은 법과 제도’, 즉 진정한 공화제와 민주주의의 수립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행위, 즉 제헌권력의 직접적인 행사여야 한다. ‘자유로운 다중에게는 공화국이 적합하고 그렇지 않은 다중에게는 군주국이 적합하다’는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중 자신에 의한 지속적인 제헌권력의 조직과 행사뿐이다.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제국의 주권에 의해서는 공화국과 군주국 사이의 딜레마가 결코 해소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거부와 탈주에서 표현과 대결로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감벤은 2004년에 입국자에 대한 지문검색에 반대하면서 미국행을 거부하는 선언을 하였다. 그는 말하자면 스스로 삶에 대한 주권의 권력 행사에 반대하는 거부의 정치적 힘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가 극단적인 경우에서의 절대적인 거부가 된다면 결국 헐벗은 삶으로의 자발적인 동참 이외에 어떤 것이 되기 힘들며, 이는 개인적으로는 고귀한 행위이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자살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네그리는 아감벤과 마찬가지로 거부와 탈주의 정치적 힘을 믿지만, 그것이 오직 다중의 집단적인 권력과 힘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입장의 차이를 보인다. 주권과의 대립에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정치적 힘을 보유하고 혁신해야 하며 주권의 결정과 엘리트의 지배에 대한 저항과 항의의 표시에서 이 힘을 행사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인 참여는 오직 다중의 참여를 배제하는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권의 행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민주주의는 어떤 유토피아적 청사진에 대한 믿음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피착취자로서의 다중이 주권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그 새로운 형태를 드러낼 것이라고 네그리는 기대한다.

홍철기씨(정치학과 박사과정)

저작권자 © 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