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모, 함석헌이 말하는 우주와 역사와 신과 생명의 씨알

그 동안 한국철학사는 정약용에 대한 소개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170여년 동안 한국철학은 없었던 것일까? 한국철학계의 원로였던 박종홍은 퇴계나 율곡보다 수운 최제우를 높이 평가했고, 동학에서 창조적인 한국철학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박종홍이 박정희의 정치고문이 되면서 동학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사라졌다. 이제까지 대학강단의 주류 철학자들은 역사와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었던 동학이나 유영모, 함석헌의 사상을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까닭은 이들의 사상이 개념이나 논리의 정합성에 치중한 서구의 근현대 철학과 형태나 양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삶과 역사와 존재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통찰이다. 진리를 바로 인식하려면 외부의 압력이나 내부의 욕망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외부의 위력이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내적 주체성을 가져야 하고 자신의 탐욕과 편견에서 자유로운 외적 개방성을 가져야 한다.
적어도 조선왕조 이래 우리 민족은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위력에 눌려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철학을 산출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군사독재의 위력에 눌려 있는 동안 주체적이고 활달한 사상과 철학을 낳기 어려웠다. 외세의 정치와 문화를 추종하거나 외세와 타협해버린 주류 지배층과 이 땅에 뿌리내리고 살던 민중 사이에 역사적 주체성과 문화적 정체성의 괴리는 상당했다.
이러한 민족사는 서구의 역사와 다르다. 서구의 역사는 외적으로는 승리한 정복자의 역사였고, 내적으로는 권력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체제와 제도를 형성해온 역사였다. 따라서 서구역사에서는 역사적 주체성과 문화적 정체성의 혼란이 없었다. 서구 사회를 주도하는 주류의 사고가 그 사회의 정체성과 시대정신을 반영할 수 있었다. 정복과 투쟁의 역사 속에서 체질화된 폭력성과 배타성이 타자(자연과 이웃)에 대한 철학적 인식과 관점에 내재해 있으며, 이런 폭력성과 배타성에 대한 자기반성이 어렵다는 데 서구정신사의 문제가 있다. 서구의 철학은 자신들의 사회형태 및 시대정신과의 긴밀한 관련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철학과 사상의 논의는 한국의 역사나 사회와 깊은 관련 없이 진행된 것 같다. 한국의 철학은 한국 역사와 한국 사회의 삶으로부터 생성되어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동서양의 정신문화가 만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실학파와 개화파의 근대화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조선왕조가 몰락해가고 지배적인 정치․종교․이념이 쇠퇴했을 때, 오랜 세월 역사의 잠에서 깨어난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섰을 때, 기독교를 비롯한 서구문화가 한국사회 깊숙이 들어왔다. 세계 근현대사에서 동서양의 정신문화가 깊이, 창조적으로 만난 자리가 한국의 근현대사였다고 생각한다. 유교, 불교, 도교의 종교 문화적 전통과 한국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지니고 한국사회는 서구의 기독교, 과학정신,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아래로부터의 민주화’가 힘차게 전개되었고 창조적인 종교․문화․사상이 분출되었다.
서구문화의 팽창과 정복으로 동서 문화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므로 서구사회에서는 동서문화의 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러면 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서구문화를 받아들여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가 어디인가? 남미는 문화적 주체성을 상실했고 아프리카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다. 인도에서 기독교는 주변 종교로 머물렀고 봉건적 카스트제도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 이래 300년 동안 지배권력과 엘리트가 근대화 과정을 엄격히 통제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배척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는 차단되었다. 중국에서는 공산화로 인해 전통종교문화는 억압되고 기독교는 배제되었다.
한국사회는 동양의 전통종교문화를 지니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였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다. 또 오랜 식민지 생활, 남북분단과 전쟁, 군사독재를 거치면서도, 급격한 산업화와 세계화를 맛보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의 이러한 값진 경험으로부터 인문학적 부흥이 일어나고 동서문명을 아우르며 세계평화 시대를 여는 철학이 나와야 한다.

유영모와 함석헌의 철학은 동서문명의 만남 속에서 형성된 세계평화의 철학이다. 유영모와 함석헌은 일제 식민시대와 독재정권 시대에 몸과 마음을 곧게 하고 깊은 영성을 추구하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충실한 사상과 철학을 닦아내었다. 함석헌과 유영모는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 충실하면서도 동서 문화와 민주정신을 융섭하여 민주적이고 깊은 영성을 지닌 세계평화철학을 형성하였다.
유영모는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고 지금 여기의 ‘나’에 집중하였다. ‘나와의 싸움’을 통해 ‘나’를 이김으로써 ‘나’와 우주 전체의 일치에 이르려 했다. ‘나의 깊이’를 파고듦으로써 신과 우주와 하나됨에 이르려 했다. 몸과 마음을 곧게 함으로써 두루 통하고(會通), ‘하나’로 돌아갈 수 있다(歸一)고 보았다. 사랑 안에서 생각이 불타오르고, 생각함으로써 나의 존재가 새롭게 형성된다고 하였다.
함석헌은 유영모의 사상을 이어받아 실존적 주체성과 우주적 전체성을 통합하는 역동적인 역사철학과 세계평화 철학을 형성하였다. 그의 씨알철학은 사람이 우주와 역사와 신과 생명의 씨알이며,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면서 자기 부정과 희생을 통해서 전체의 삶과 뜻을 실현하는 존재임을 밝혔다. ‘나’를 중심에 놓는 주체철학이면서 전체를 실현하는 공동체 철학이다. ‘모름’과 ‘약함’에서 생명진화의 동인을 보는 ‘전체주의의 사랑’ 안에서 자유와 평등을 통합하고 기독교와 유교, 불교, 도교를 회통하고, 본능(감정)과 이성과 영성의 통일, 앎과 행함의 통일, 민족과 국가들의 평화통일을 추구하였다.
아래로부터의 민주화과정과 동서 정신문화의 만남의 과정으로 진행된 한국근현대사에 충실했던 유영모와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에는 민주정신과 동서문화의 정신이 합류하여 큰 종합을 이루었다. 서재의 학자가 아니라 시대정신과 역사의 삶에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유영모와 함석헌의 삶과 정신 속에 시대정신과 역사가 온전히 스며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정신과 사상에는 그리스와 서구 철학의 로고스(이성, 생각), 기독교의 말씀(사랑), 동아시아의 길(道), 한민족의 한(韓: 크고 하나임)이 합류하고 통합되었다.
함석헌의 사상을 접한 유럽의 한 철학교수는 함석헌을 ‘20세기의 소크라테스’라고 경탄하였다고 한다. 앎과 행함의 변증법적 통일을 추구한 것(知行合一), 쉬운 글 속에 심오한 진리를 담은 것, 정해진 답을 주지 않고 근본적인 물음을 물음으로써 삶과 역사 앞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하게 했다는 점에서 함석헌과 소크라테스는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차이도 있다. 소크라테스가 승리한 정복자들로서 노예들을 거느린 그리스 민족의 귀족 청년들을 대상으로 철학을 했고 그리스 문화의 지평 안에 머물렀다면, 함석헌은 식민지 백성으로서 동서문명이 만나는 세계문명사적 지평에서 고통 받는 민족과 민중을 중심에 두고 세계평화의 철학을 형성하였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서구지성사에서 일으킨 정신적 자극과 영향력보다 유영모와 함석헌이 세계지성사에서 일으킬 정신적 자극과 영향력이 더 클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까?

 박재순 (씨알사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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