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벡의 ‘세계위험사회’이론 … 위험극복을 위한 세계시민적 정치 제시해

“유럽이 볼 때 한국은 이미 강대국입니다. 이제 전 지구적인 문제가 된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 어떻게 그 위상에 걸맞은 공헌을 해야 할지 생각해볼 때입니다.”

『위험사회』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울리히 벡 교수(Ulrich Beck, 독일 뮌헨대 사회학연구소장)가 사회발전연구소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해 지난달 31일 문화관 중강당에서 「위험에 처한 사회: 비판이론의 새로운 과제」를 주제로 공개강연을 열었다. 벡 교수는 사회발전연구소가 노벨상 수준의 세계적 석학을 한국으로 초빙해 의견을 듣는 ‘서남강좌’의 강연자로 초청된 것이다. 이번 그의 한국행에는 부인이자 동료 사회학자인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교수(Elizabeth Beck-Gernsheim, 독일 에어랑겐-뉘렌베르크대·사회학과)도 동행했다. 벡-게른스하임 교수도 여성연구소 주최로 4월 1일 교수학습개발센터에서 「사랑과 가족에 대한 성찰」을 주제로 강연했다.

울리히 벡 교수는 1986년 발표한 『위험사회』에서 근대화에 내재한 ‘위험(risk)’의 존재를 현대사회의 고유한 특성으로 제시한 바 있다. 그의 독창적 이론인 ‘위험사회론’은 지난 20여년 간의 세계적 변화와 그에 따른 벡 교수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현재 ‘세계위험사회(World Risk Society)’ 개념으로 확장됐다. 『위험사회』에서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말로 ‘위험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위험의 평등성을 역설했던 그는, 이번 강연회에서는 ‘위험을 정의하는 이들이 가지는 권력’에 주목해 ‘지구적 위험의 불평등’을 주장했다. 가난하고 문맹률이 높은 후진국들로 위험이 ‘수출’되면 이들은 선진국보다 치명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벡 교수는 “기후변화와 같은 ‘위험’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위험에 가장 취약한 이들도 끌어안아야 한다”며, ‘위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대안으로 시민사회를 국가와 연결한 ‘세계시민적(cosmopolitan) 정치’를 제시하기도 했다.

강연 후에는 교수와 학생들을 비롯한 서울대 구성원뿐만 아니라 외부 언론과 지자체 단체장들도 참여해 열띤 토론분위기를 조성했다. 한국의 대북 문제에 대한 벡 교수의 의견을 묻는 질문에 그는 “두 나라만의 직접적인 교류보다는 세계시민적인 방식의 의사소통으로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며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전 독일 수상이 유럽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통일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던 독일의 사례를 들기도 했다. 또 부산의 한 지자체 관계자가 “독일 정부에서 어떤 위험관리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가”를 묻자 “시스템 구축 이전에 누가 위험을 정의할 것인가를 먼저 정해야 한다”며 사회이론가다운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2006년부터 벡 교수의 한국 방문을 추진해왔던 사회발전연구소장 정진성 교수(사회학과)는 “최근까지의 연구성과를 하나의 논리로 종합해낸 강연문이 특히 훌륭했다”며 강연내용에 대해 높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석민씨(사회학과·석사과정)는 “세계적 석학의 강연을 서울대에서 직접 듣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회”라면서도 “이번 강연의 대부분이 영어로 진행돼 일반 청중이 따라가기에는 벅찬 측면이 있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한편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교수도 1일 강연에서 현대사회의 ‘지구화’와 ‘개인화’의 측면에서 가족의 변화를 분석했다. 최신작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와 벡 교수와의 공동저작인 『사랑은 지독한 혼란』 등으로 국내에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벡-게른스하임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전통 가족은 해체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른 기능 변화에 맞춰 새로운 형태를 띠는 것뿐”이라며 더 이상 공동의 경제적 기능을 가지지 않는 ‘가족 이후의 가족(post-family family)’의 양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했다.

이날 강연에는 한경혜 교수(소비자아동학과)와 조한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과) 등 다양한 전공분야의 청중이 참가하여 광범위한 주제로 토론이 진행됐다. 패널인 박소라 교수(한양대·신문방송학과)가 강연내용 중 ‘가족구성원들 간의 조정자(coordinator)로서의 여성의 새 역할’과 관련, 한국 사회의 독특한 현상인 ‘기러기 아빠’를 거론하자 벡-게른스하임 교수는 “처음 들어본 흥미로운 문제”라면서도 “교육 때문에 가족이 별거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이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벡 교수와 벡-게른스하임 교수는 각각 경희대와 한양대에서 강연과 토론회 등의 추가 일정을 마친 뒤, 4일 프레스센터에서의 ‘시민사회와 대화’를 끝으로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지난 5일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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