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순 교수(안양대 기독교문화학부)

하이데거는 스스로 그의 자화상을 ‘사유의 방랑자’로 그린다. 길과 별의 메타포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철학함의 여정을 시적으로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별을 향해 길을 가기를, 오직 이것만을!’ 희망한다. 하이데거는 언제나 자신의 사유함을 길을 가는 것, 길을 내며 가는 것, 길을 가는 도상(道上)에 있는 것으로 비유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길을 뜻하는 노자의 도(道)에 주목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이정표’, ‘숲길’, ‘들길’, ‘언어에로의 도상에서’ 등의 이름표를 붙인다. 그에게 사유의 결실인 작품들은 사유가 걸어온 ‘길들’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이 닦아놓은 이미 알려진 철학의 궤도에서 한 걸음 물러난다. 그러고는 때로는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어쩌면 길이 차단되어 우회로에서 헤맬 수 있는 미답(未踏)의 숲속에 난 사유의 오솔길을 걷기를 권유한다. 그의 일관된 화두는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사태다. [하이데거는 ‘존재(있음, 임)’와 ‘존재자(있는 것)’를 구별하고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서 규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편집자 주] 서양의 철학은 플라톤 이래로 존재자의 시원을 망각하고, 존재자에 대한 소유와 지배에로 지금까지 내달려 왔다. 그저 단순한 존재, 있음 자체를 묻지도 않고, 오히려 존재자의 본질, 근거(존재자성)만을 물어왔다는 것이다. 존재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어두운 밤과 같은 현대 기술시대에는 인간을 포함한 뭇 존재자는 기술적 이용과 조작의 대상이 되어, 부품으로서의 기능적 가치와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각 존재자의 고유하고도 그 형형(炯炯)한 존재의미와 가치가 상실되었다. 서양 형이상학이 닦아놓은 큰 길을 벗어나서, 미답의 사유의 숲길에서 그는 존재를 물으면서 존재를 만나고자 한다. 

 나무꾼과 산지기는 숲속의 길들을  잘 알고 있으며, 숲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하이데거는 주목한다. 농부가 대지의 본성을 알아차리듯이, 그들은 숲의 본성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연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려들지 않고, 자연의 저 순진무구한 드러남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감응하면서, 친밀한 이웃이 되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지 않은가!  사상가와 시인 및 예술가도 존재와의 경험(만남)을 통해 존재를 보살피고, 존재에 감응한다. 그들의 본분은 존재의 진리를 개념으로, 언어로, 예술작품으로 드러내는 창조적 작업에 있다. 여기서 존재는 인식대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사유의 방랑자에게 하나의 생기사건(Ereignis)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숲길을 걸을 때 경험하듯이, ‘숲 속의 빈터’가 열리면서 존재자의 ‘있음’은 은폐를 드러내는 ‘비-은폐’(aletheia, 진리)로서 밝아온다. 사유의 숲길에서 존재는 스스로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고, 인간은 ‘존재의 집’인 언어를 통해 ‘나무’의 존재, ‘샘’의 존재를 만난다. 이는 오늘날의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사고가 다다를 수 없는, 우리에게 절실한 존재경험이고, 더욱이 사상가가 저 존재(있음)의 경이와 신비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초연한 내맡김의 태도다.

1편의 논고와 5편의 강의록 수록
『숲길』에는 1935~1946년 사이에 나온 1편의 논고와 5편의 강연문이 실려있다. 이 사색의 결과들은 동일한 숲속에 뻗어있는 다양한 갈랫길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존재의 경이로움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고, 존재의 부름에 귀기울일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단행본으로는 이미 1950년, 1960년(레클람판, 보탬말추가)에 출간되었고, 7판부터는 전집 제5권에 포함되어 완성본으로 1978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는 하이데거에 의해 존재사적인 사유의 얼개로부터 나온 개별적 질문들이 제시되고 발전된다.

「예술작품의 근원」(1935년)에서 저자는 예술을 미학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존재의 진리와의 연관 속에서 숙고한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본질은 심미적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진리의 작품에로의 자기 정립”에 있다. 환언하면 예술은 존재자의 참모습을 창조하는 행위이자, 존재의 진리를 환히 밝히는 기투행위, 즉 진리의 도래가 일어나게 하는 행위다.  

「세계상의 시대」(1938년에서는 ‘사유’를 결여한 ‘연구’가 되어 버린 근대학문의 본질성격을 비판한다. 이제 연구대상으로 존재하는 그런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인간은 근대에 와서 ‘주관’(subjectum, 基體)이 됐고, 세계는 ‘상’(Bild, 像)이 돼버렸다. 이른바 존재자 전체는 그것이 표상됨으로써만, 인간에 의해 ‘상’으로 세워지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헤겔의 경험 개념」은 헤겔의 『정신현상학』(1942~43년)의 서론 부분을 해석하면서 헤겔의 ‘경험’ 개념의 성격을 밝힌다. 헤겔에게서 경험은 절대적 주체의 주체성이며, 경험한다는 것은 현존함의, 다시 말해 존재의 한 방식이라고 하이데거는 해석한다. 헤겔에게서 존재는 대상성, 객관성, 정신의 현실성으로 지칭된다고 보면서, 하이데거는 헤겔의 경험개념을 존재사적으로 해체하고자 한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말」(1936~1940년)은 ‘존재의 역사’에서 니체의 사유를 서구형이상학의 극복이 아닌 완성으로 파악하는 과제를 내세우고 있다. 니체는 형이상학의 최종단계로서 “존재물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대답을 니힐리즘으로 드러낸다고 해명한다.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1946년)는 횔덜린과 릴케의 시적인 경험을 논하면서, 신이 떠나가 버린 궁핍한 시대에 시인이 맡아야 할 사명은 어디에 있는지 진지하게 숙고한다. 시인은 ‘세계의 밤’이라는 시대의 역사적 운명 속에서 우리가 어디로 귀속해야 하는가라는 존재물음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1946년)은 ‘시간의 질서에 따라’ 사물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물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잠언은 서양의 사유에서 가장 오래된 잠언으로서 하이데거는 그리스 초기의 존재경험을 통해 존재망각의 어둠 속에 빠져있는 서양을 다시 새롭게 일깨우는 여명이 된다고 생각한다.   
 
역자의 노고 돋보이는 번역
이 번역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려는 역자의 장인정신이 돋보인다. 난해한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도 별 무리없이 번역해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이데거 사유의 전체적 흐름과 구조 속에서 상세한 역주를 달았다는 점에서 역자의 각고의 노력이 엿보인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자의적인 번역어와 많은 역주가 오히려 독자들이 텍스트에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할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 그 예로 ‘현-존재(Da-sein)’를 ‘터-있음’이라 번역하여 혼란을 준다는 점이나, 중요한 개념을 다소 무리하게 한글화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역서는 원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멘토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출간된 지 50년이 지났지만 이 책은 여전히 기술형이상학이 지배하는 오늘날, 일체의 존재자가 자신의 고유성과 존재가치를 망각하도록 다그치는 시대정신에 맞서, 모든 존재자의 근원과 각각의 존재의미를 숙고하게 하는 데 좋은 길안내자가 될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신상희 옮김┃나남출판┃648쪽┃3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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