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국사와 세계사에 매력을 느껴 국사학과에 입학한 김혜진씨(가명). 그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Historiai)』를 사려고 서점을 찾았다. 하지만 『역사』의 유일한 완역본이 일본어 중역본일뿐더러 역사학 전공자가 번역한 것도 아니었다. 책은 무리없이 읽을 수 있었지만 원전 번역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Leopold von Ranke)의 책을 사려고 발걸음을 옮겼다가 더욱 놀랐다. 완역된 랑케의 책이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번역출판계는 부실공사?=대한출판문화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2007년 출판된 신간 중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23%(12,321종)에 달했다. 하지만 이 통계는 ‘납본(새로 발간된 출판물을 해당기관에 제출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평균적으로 출간된 책 중 73%만이 납본된다. 이를 감안하면 서점을 통해 독자들에게 다가간 번역서는 약 1만7천여 권이다. 하지만 번역서 중 대부분은 실용서나 가벼운 에세이류다. 실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판매부수 상위 30위권 내에서 번역서는 16종에 달했지만 『시크릿』,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 『마시멜로 이야기』 등 소위 고전과 거리가 먼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 박상익 교수(우석대·사회교육학과)는 “국민의 기초교양 수준을 높일 수 있는 서양의 고전들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며 “다들 중요하다고는 말하지만 잘 팔리지 않아 출판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의 대표작 『로마사』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신학대전』 등의 완역본이 없는 실정이다.

번역된 책들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미 번역된 책을 표절해 재번역인 것처럼 출판하는 중복출판, 대리번역 문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번역평가사업단을 구성해 출판된 영미문학 번역서를 검토한 결과 표절본이 48%에 육박했다.

오역 역시 큰 문제다. 지난 2005년 이재호 명예교수(성균관대·영어영문학과)는 번역가이자 소설가로 활동 중인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해 “신화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오역”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오역 논쟁’으로 이어져 학계와 대중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지금도 각종 번역서의 오역문제가 인터넷카페 ‘비평고원’이나 개인 블로그 등을 통해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출판사의 피드백은 잘 이뤄지고 있지 않다. 저작권이 살아있는 경우에는 오역이 발견되고 학자들의 수정의지가 있어도 수정하거나 재번역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척박한 번역계 현실=현재 전문 번역가들은 대부분 번역가 이외의 직업을 갖고 있다. 번역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원고료를 인세 혹은 매절의 형식으로 받는다. 역자인세는 평균적으로 판매가의 5%정도다. 1만원 짜리 책 한 권을 몇 개월에 걸쳐 번역해도 1천권이 팔려야 50만원을 받는 셈이다. 물론 1천권이 팔리기 위해 몇 년이나 걸리는 책들은 허다하다. 매절은 원고지 1매당 일정액을 받는 형식인데 매당 3~4천원 정도가 일반적인 액수다. 출판사와 역자는 책의 성격에 따라서 둘 중 한가지 방식을 혹은 둘을 결합한 방식을 협의해서 선택한다. 그러나 소수의 ‘스타 번역가’들을 제외한다면 번역료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부당한 대우는 번역이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는 번역가들이 다른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어 번역에 투자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져 번역의 질은 더 저하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번역학회 총무이사 최희섭 교수(전주대·영미언어문화전공)는 “번역가를 일종의 창작자로 대우하는 외국과는 달리 한국 출판시장에서 번역가는 창작자에 종속된 것으로 평가받는다”며 “‘번역 선진국’으로 평가되는 일본에서는 번역가들이 번역료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해당 분야의 지식을 갖춘 편집진을 보유하지 못한 출판사도 좋은 번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런 출판사들은 교정·교열 이상의 편집이 힘들다. 이제이북스 전응주 대표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고 번역한 원고와 원문을 대조해가며 검토할 수 있는 편집진을 갖춘 출판사가 적다”며 “그만한 능력이 있는 인재들은 출판계보다 수입이 더 많은 분야를 선호한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나 둘 싹트는 대안들=관계자들은 번역시장의 각종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번역비평 문화의 활성화’를 꼽았다.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다빈치 코드』는 공론화된 번역비평이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사례로 평가받는다. 『다빈치 코드』의 번역비평은 학계가 아닌 대중으로부터 시작됐다. 웹상에서 원문과 번역본을 비교하며 오역을 지적하는 누리꾼들이 하나 둘 모였고 급기야는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누리꾼들도 있었다. 이에 출판사인 베텔스만코리아는 “흐름에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오역은 아니었다”면서도 25쇄부터 외국소설 전문 번역가의 감수를 거친 개역판을 출간했다. 지난해 한국번역비평학회는 번역시장에서 전문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번역비평』 창간호를 발간했다. 회장 황현산 교수(고려대·불어불문학과)는 학회 창립 학술대회에서 “공개적·객관적으로 번역을 논의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학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번역에 대한 학계의 인식도 차츰 나아지고 있다. 교육부(현재 교육과학기술부)는 지난해 5월 발표한 「인문학 진흥 기본계획」에서 “논문형 작품만 학위논문으로 인정해온 관행을 바꿔 동서양 고전을 번역하더라도 박사논문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학술진흥재단이나 대학에서도 번역을 연구실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학술진흥재단 인문학지원팀 정혁씨는 “사업에 따라 다르지만 번역서가 저서와 같은 대우를 받는 분야도 있다”며 “오는 7월에 신청을 받기 시작하는 ‘명저번역지원’ 사업 등을 통해 학술기반을 구축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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