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릿 소설, 현대 젊은 여성의 삶 반영하고 있지만 그들의 다양한 현실적 불안은 담아내지 못해

왜 칙릿인가
1억원의 고료가 걸린 제4회 세계문학상을 『스타일』이 거머쥐었다.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은 『쿨하게 한걸음』에 돌아갔다. ‘칙릿’이라고 불리는 이 두 소설의 문학상 수상은 지금까지 순문학 위주였던 한국 문학계에서 이례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조선일보」 연재 뒤 2006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가 이 돌풍의 진원지다. ‘칙릿’은 젊은 여자를 뜻하는 속어 ‘chick’과 문학이라는 뜻의 ‘literature’의 합성어다. 즉, 칙릿은 젊은 여자 독자를 타깃으로 쓰이는 소설이다. 영국의 『브리짓 존스의 일기』(헬렌 필딩)나 미국의 『쇼퍼홀릭』(소피 킨셀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가 대표적인 칙릿이다. 젊은 여성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이라고 하면 에쿠니 가오리의 연애소설이나 할리퀸 로맨스를 필두로 한 로맨스 소설을 상상하기 쉽지만, 칙릿은 그런 책들과는 구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현대를 사는 여성의 일과 우정이 사랑만큼 중요한 가치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현대를 사는 젊은 여성의 위상 변화와 관계가 있다. 20대 중반에 소개팅과 맞선을 거쳐 나이 서른이면 애 엄마가 되는 게 일반적이었던 10년 전과 달리, 이제 회사를 다니다 보니 어느덧 30대라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아졌다. 미혼과 비혼, 알파걸과 올드미스, 골드미스라는 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서른 즈음의 여자들 이야기가 전면에 두드러진 책들은 그래서 인기를 끌고 있다.

대표적 칙릿 세권

『스타일』은 서른한 살 패션지 여기자인 이서정이 보고 겪는 패션계의 이면과 일, 그리고 사랑을 그린다. 이 책은 「하퍼스 바자」의 피처에디터로 일했던 작가 백영옥의 실제 경험이 녹아있다는 이유로 더 관심을 끌고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가 극중 인물처럼 미국판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어시스턴트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 큰 반향을 얻었던 것과 유사한 수순이다. 「필름2.0」과의 인터뷰에서 백영옥 자신이 “내 입으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한국판을 쓰겠어!’ 떠들고 다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션지 기자로서의 삶에 관한 디테일에서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반면 주인공들의 연애 문제만 나오면 해묵은 로맨스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유치함이 아쉬움을 남긴다. 『스타일』의 강점은 20대 여성의 소비문화와 패션, 미용에 대한 강박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프라다와 불우이웃돕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의 특성상 ‘강남 좌파’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긍정적인 시각과 ‘된장녀의 푸념’을 그렸다는 뚱한 평을 동시에 받고 있다.

『쿨하게 한걸음』은 『스타일』에 비하면 한국 문학에서 익숙한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풀어가는 소설이다. “정말 상상과는 너무 다르다. 십대 후반, 혹은 이십대 초반쯤에는 서른살 정도면 인생의 모든 것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있을 거라고 믿었다”는 주인공 연수는 서른셋에 직장도 애인도 없는 신세가 된다. 세

상에 반항하기엔 때가 늦었고, 투항하자니 손에 쥔 게 없다. 부글거리던 연애를 걷어내고 나니 너무나 단촐해져버린 일상을 어떻게든 헤쳐나가려는 연수 곁에는 비슷하고도 다른 또래의 친구들이 있다. 세상이 알파걸이니 골드미스니 하는 말로 과대포장하는 그 또래의 고독과 불안이 잔잔한 여운을 준다. “서른세살이 되고 보니 서른세살이라는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고,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결혼을 했거나 안했거나,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없거나, 있었는데 모호해졌거나 없었는데 생겼거나, 행복하거나 불안하거나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혹은 그것들의 혼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함으로 무장한 『스타일』과, 쿨하다는 단어 속에 숨은 외톨이를 보여주는 『쿨하게 한걸음』의 중간 지점에 존재하는 소설이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다. 주인공 은수는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으로 회전하는 청춘의 트라이앵글을 막 벗어난 서른한 살이다. 일도 그럭저럭 하고 있지만 제대로 되고 있지는 않고, 연하남과의 연애는 잘 풀리는 듯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완전히 꼬여

버리며, 인생을 구원할지도 몰랐던 맞선남과의 결혼은 어처구니없는 과거사를 이유로 무너져버린다. 서른한 살, 만으로 따져서 아직은 서른이라고 우길 수 있는 마지막 시기. 가진 것은 “입가의 팔자주름, 알량한 통장 잔고, 깔고 앉은 원룸 전세금, 반 의절 상태인 부모, ‘한심하게 살기 대회’ 대표 선수 같은 친구들, 사랑에 관한 몇 가지 실속 없는 추억들”이다. 뭘 꿈꿔볼라쳐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혼을 겪어 돌아온 싱글이 된 친구가 하나쯤 있고, 이혼남과 사귀는 친구도 하나쯤 있다. 실패한 연애와 사회생활의 틈바구니에서 은수가 찾아 헤매는 것은 동화책에서 읽은 눈 먼 해피엔딩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를 비롯한 칙릿에서 또래 친구들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인공이 필요 이상으로 자학하지도, 그렇다고 쉽게 세상과 타협해버리지도 않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인기 비결은 화려한 연애사와 패션, 뷰티 감각이 다가 아니었다. 가족보다 가깝고 명품보다 빛나는 우정이 그 한가운데 있었다.

달콤한 문장들이 놓치고 있는 것들
칙릿 붐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출판계에 불어닥친 일본 소설, 즉 엔터테인먼트 소설 붐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소설을 문학이라는 이름에 가두는 대신 ‘재미있는 읽을 거리’로 소비하는 세태의 반영이라는 말이다. 거기에 한국 출판시장의 변치않는 타깃이 ‘20대 여성’임을 감안하면, 라이프스타일을 적극 반영한 칙릿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몇 권의 책이 칙릿을 인기 장르로 자리잡게 하는 기반이 될지는 조금 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한국의 여자 2030의 삶에 명품소비나 넋두리 말고도 다양한 현실적 불안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책들은 달콤한 문장들 속에 슬쩍 흘려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다혜(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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