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만 열사 투신 20주년에 부쳐
조성만 열사의 육촌 동생이 올리는 글

1988년 5월 15일, 꼬박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날 저녁 전주에 사시는 당숙이 급히 전화를 하셨죠. 오빠가 데모를 하다가 많이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숙모만 서둘러 서울로 올라오시는 중이었고, 당숙은 다급하신 마음에 아버지에게 병원에 가 봐달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부디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바라며 병원에 가신 아버지 연락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연락을 채 받기도 전에 뉴스를 통해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할복 투신하는 오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빠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랜만에 오빠의 유서를 읽습니다. 곧 있을 올림픽으로 연일 떠들썩했던 당시, 오빠는 통일을 염원하며 남한의 단독 올림픽이 아닌 한민족 공동 올림픽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민족 비극의 중심에 있어 왔던 미국, 그리고 그 미국의 대리 통치 세력으로 민중의 삶을 유린하던 군사 정권을 비난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안은 달라지고 이전의 문제는 시의성을 잃고 방기됩니다. 오빠를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그 문제들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닌 것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압니다. 오빠의 죽음이 미국과 군사 정부의 축출 그리고 올림픽 공동 개최라는 단지 그 시점에서 유효했던 사안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남북의 분단과 친미 군사 정권 아래에서 고통 받던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에 오빠가 ‘더 이상 자책만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 절망과 분노가 그토록 깊지 않았다면 오빠는 지금쯤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묵묵히 사제의 길을 걷고 있겠지요.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오빠가 최후에 택한 길은 사제가 아닌 죽음이었지만 오빠의 사랑만큼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시의성이 적용될 수 없는, 그래서 언제나 시의성을 갖는 그 사랑은 부당한 현실에 대한 절망과 분노를 함께 나누며 저항하는 다수의 연대를 이끌어 내리라 믿습니다.

오빠가 떠난 20년 전만큼이나 척박한 세상입니다. 이젠 남은 이들의 몫이겠지요. 24년 짧았던 삶, 이곳에서의 힘들었던 기억일랑 다 놓아두고 그곳에서는 부디 편히 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정은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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