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살의 서울대 사회학과 학생은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풍경」으로 등단했다. 그는 시인이 된다는 것 자체에 대해 고민하다 문단을 뒤로 한 채 유학을 떠났다.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심보선 시인은 14년 만에 첫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심보선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그동안의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 시집의 키워드는 ‘슬픔’과 ‘냉소’인 듯 보인다. 냉소적 유머 속에서 슬픈 삶의 단면을 포착하는 그의 언어는 우리시대 생의 무게를 적절히 환기한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

‘슬픔’은 몰락과 환멸의 현 세계를 바라보는 내면의 표정이다. 이 슬픔에 대해 문학평론가 허윤진씨는 “그가 택한 길이 소멸의 방향으로 뻗은 ‘사라지는 길’일지라도, 슬픔이 완벽하게 사라진 순간이 찾아와야 생을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인은 사라지는 일에 골몰하면서, 자아와 세계에 냉소의 시선을 던짐으로써 이 시대를 건너려 한다. 가치 대신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 연대 대신 경쟁만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에서 그는 기꺼이 “분열하고 명멸해왔다.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다짐한다. 이와 같은 슬픔과 냉소에 대해 문학평론가 이기성씨는 “냉소와 슬픔의 아크로바트(곡예사)는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하는 기예이자 세계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라고 해석하면서도 “슬픔의 도덕률은 세계와 타자에 대한 침묵 속에서 자폐의 공간으로 침윤될 우려가 있다”는 단서를 달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인은 냉소와 슬픔을 승화시키고자 “내가 원한 것은 단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었네”(「먼지 혹은 폐허」 중)라며 다시 사랑을 꿈꾸고 있기도 하다.

“나는 갈수록 추해진다/나쁜 냄새가 난다”(「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중)며 자학적인 너스레를 떠는 시인. 하지만 그의 시 속에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숨어 있다. "그가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가까스로 긁어모아 내뱉은 핏자국"이 독특한 비유의 공간 속에서 선연하다. 현실주의자의 차가운 꿈에 귀기울여보자.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지음┃문학과지성사┃173쪽┃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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