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장애를 극복한 예술가들. 첫번째 이야기 - 구족화가 임인석씨

사진: 노승연 기자
“길을 가로질러 벽이 놓여 있다. 가야만 하는데 작은 창문으로 길고 긴 길이 보인다. 그러나 나를 응시하고 있는 벽들의 수많은 눈들, 넘어야 한다. - 임인석,  「벽」 작품노트 中”

성우(性雨) 임인석씨(39). 그는 왼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다. 생후 8개월, 고열에 따른 쇼크로 뇌성마비 1급 장애판정을 받은 임씨는 세상의 수많은 벽과 눈을 넘어 화가로 거듭났다. 그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다는 임인석씨를 만나기 위해 봄볕이 따스한 5월 어느 날, 평택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찾았다.

◇세상과 소통하는 단 하나의 창구, 그림=첫돌을 맞기도 전에 얻은 장애로 임인석씨는 세상과 멀어졌다. 몸이 불편한 탓에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발가락에 펜을 끼워 여기저기 그림을 그리는 ‘놀이’를 발견했다. 5세 무렵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그것을 보는 것이 마냥 좋았어요. 그러다가 자연스레 미술 자체에 호기심이 생겼죠. 그 이후로 쭉 그림을 그렸던 것 같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그림 그리기. 하지만 임씨는 미술에 남다른 애착과 소질을 보였다. 임씨의 아버지는 “날이 갈수록 좋은 그림이 나오더라”며 “동네사람들이 그림을 사갈 정도로 인정을 받는 것을 보고는 본격적으로 미술활동을 뒷받침하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의사소통이 힘든 그에게 그림은 단순한 소일거리 이상의 의미였다. 장애를 극복하고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키는 유일한 길, 임씨는 그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장애를 넘어 인간 본연의 모습을 탐구하다=임인석씨는 20세가 되던 해부터 약 7년간 네 명의 화가들에게서 사사하며 전문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임씨는 타인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임인석씨의 그림 중에는 삶, 죽음, 욕망, 본능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 화두를 다룬 작품들이 많다. 다가오는 죽음을 시계, 촛불, 낫에 앉아있는 까마귀 등으로 표현한 「죽음과 공포」(2003)가 대표적이다. “어찌 보면 섬뜩하게 비칠 수도 있는 작품이에요. 마치 죽기 직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죠. 제가 이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주된 창작 소재로 삼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장애인·비장애인 모두 인간일 뿐이거든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을 넘어 인간 자체의 내면세계를 탐구해온 임인석씨. 임씨는 한걸음 더 나아가 주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세상만물 속에 담긴 감정과 이야기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주위 사물과 내면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거죠. 그런 체험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와 가치를 배우고 있습니다.”

임인석씨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그 무엇이기보다 바로 그것이 되고 싶다. 나이고 싶다’라는 갈망으로 요약했다. 그림을 통해 장애를 극복하고 완전한 자아를 찾고 싶다는 뜻으로, 이는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장애는 제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도전 과제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곧 사회에 대한 도전 과정이죠. 인간에 대한 탐구, 세상만물에 대한 탐구를 통해 그 도전에서 승리하고 싶습니다.”

◇장애로 힘든가요? 꿈을 저축하세요=임인석씨는 세계구족회화협회 정회원이다. 현재 활동 중인 국내 구족화가 20여명 중 세계구족회화협회의 정회원은 임씨를 포함해 단 두 명에 불과하다. “예술성·회화성을 인정받은 국내 구족화가는 아직 드뭅니다. 「세계구족화가 해외 그룹전」에 출전했을 때, 외국 구족화가들의 입지에 상당히 놀랐어요. 예술성도 인정받고 사회적인 대우도 국내보다 훨씬 낫고…. 국내에서도 구족화가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돼야 하지 않을까요?”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임인석씨. 그에게 화가로서의 꿈을 물어봤다. “10여년 전이었던가요… 울산문예회관에 작품을 기증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얼마 전 열린 전시회에서 한 관객이 그 작품을 봤다며 말을 걸더라고요. ‘내 그림을 본 사람이 점점 늘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 그림을 보고 저와 소통할 수 있길 바랍니다.”

임인석씨는 장애로 어려움을 겪는 이를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꿈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인 자살이에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끊임없이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꼭 결실을 얻을 필요는 없습니다. 노력을 저축하며 살아가고, 그 결실은 이자로 생각하는 것이 어떨까요. 생이 다할 때까지 꾸준히 노력을 저축하다보면 언젠가 완전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뇌성마비 시인 최명숙씨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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