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을 일어 냄비에 안친다. 밥 뜸이 드는 동안 싱싱한 푸성귀를 씻어 적당한 길이로 잘라 놓고, 집된장에다 멸치가루와 고추장을 섞고 볶은 깨를 술술 뿌린 후 참기름 두어 방울 섞어 놓는다. 수긋하게 부풀어 오른 밥 한 그릇에 갖은 야채를 집어넣고 된장 양념 이놈을 한 숟갈 넣어 썩썩 비벼 푸지게 먹으면, 세상이 행복하다.

적어도 아홉 살 난 아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저녁식사는 없다. 피자와 라면에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 뜻밖에 즈이 에미가 눈짐작으로 비벼놓은 푸성귀 비빔밥 양푼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한 숟가락 더 먹겠다고 야단이다. 흐뭇하다.

문제는 남편이다. 남편에게는 어머니가 해 주신 슴슴하고 칼칼한 두부조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작년에 따로 나와 살게 된 후 나는 어머니가 쉽게 만들어 내놓는 맛난 찬을 대부분 엄두도 못 내었다. 자작하니 졸아들었지만 속은 말캉하고 고소한 콩장, 고슬고슬하게 무친 나물들….

그나마 지난해에는 집에서 밥 해먹은 기억이 손꼽을 정도이니 말해 무엇하리. 논문 쓰느라고 주말에도 관악산 아래에서 엎디어 있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논문 매듭짓고 무사히 졸업하게 된 데에는 즉석식품의 공이 컸으니 ‘감사의 글’에 넣어주어야 한다고 농담을 했을까. 어쨌든 1회용 식품의 시대는 끝났다. 학교 문을 나서면서, 나는 잠깐 망설인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다시 상을 차려야 한다. 밥을 지어 먹여야 한다. 무슨 반찬을 해야 하나? 시어른의 손맛을 시늉이라도 내 볼까?

그렇지만 더 이상은 견습생이 아니다.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흉내내기 연습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일이다. 에미와 숟가락 싸움을 하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 속이 편한 밥을 지어 놓으니 아들도 맛있어 하지 않았나. 있는 그대로 상을 차릴 수밖에. 그러다 보면 어른 손맛을 못 잊어 하는 사람도 함께 하는 상이 될 수 있을 테지.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먹는 밥상을 차릴 수 있을 테지.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설령 함께 하는 밥상을 차리지 못하더라도, 거짓 없이 배를 불리는 소박한 밥을 지을 수 있음을 항상 감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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