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현식 교수 사범대 국어교육과

1880년에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은 일본에 다녀오면서 주일(駐日) 청국(淸國) 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에게서 그가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과 함께 중국의 개화 사상가 정관응(鄭觀應)이 지은 『易言(이언)』이란 책을 받아 왔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면, 중국과 친중국(親中國)하고, 일본과 결일본(結日本)하며, 민주국가 미국과 연미국(聯美國)하여 개국해야 한다고 제언한 외교책략서로 오늘의 한국 외교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언』은 정관응이 쇠약해 가던 청나라의 부국강병책을 밝힌 책이다. 그는 16세 때 과거시험 실패 후 상해로 가서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무역업을 하면서 세계에 눈을 떴으며, 중국이 의회민주주의 산업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관자(管子)의 부국강병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언』을 지었다.

김홍집이 『이언』을 가져온 후 조선에서도 1883년에 한문본이 복간되고 또한 언해본도 나와 사대부층에 전파되었다. 사대부들은 『이언』을 읽어 천하의 일을 알게 되었고, 부국강병책이 『이언』에 모두 실려 있어 임금께 상소를 할 적에는 『이언』을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언해본 『이언』은 조선 후기 국어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다.

책 제목 『易言』은 『시경(詩經)』의 「소아편(小雅篇)」에 나오는 “쉽게 따라서 말하지 말라”는 뜻의 “無易由言”이라는 시구에서 왔다. 『시경』에서는 쉽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관응 자신은 어리석어 쉽게 이야기한다는 겸손의 뜻이 담겼다. 그러나 이 책은 쉽게 쓰인 책이 아니라 그가 평생을 두고 고쳐가며 쓴 책이다. 그가 다룬 주제는 공법(公法), 세무(稅務), 의정(議政), 국방(國防), 교육(敎育) 등 37개 영역에 걸치므로 조선 사대부들이 매료되기에 충분하였다.

지난 겨울, 17년 만에 이 책의 주해 작업을 마치면서 『이언』이란 책 제목이 새삼 가슴을 쳤다. 당파 이익에 함몰된 당파언어, 선동의 왜곡언어, 비방의 폭력언어가 난무하는 오늘의 세태를 볼 때, 우리는 조금 안다고,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얼마나 쉽게 말하는지.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한 말이 그 얼마인가.

논문에서나 강의실에서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깊이 통찰하지 않고 쉽게 내놓은 지식 또한 거짓이 아닌가. ‘거짓’의 어원이 ‘거칠다’에서 오고 ‘거짓말’이 ‘거츤말’에서 왔다고 하는데, ‘사려’(思慮)와 ‘배려’(配慮) 없이 뱉는 비방, 선동, 과장, 왜곡의 거친 말에는 창조주, 인간, 자연, 진리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경외(敬畏)가 담겨 있지 않기에 결국은 우리의 가슴과 사회를 거칠게 만들고 병들게 한다.

쉽게 말을 하지 않으려면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말은 폭탄과 같아 터지면 수많은 사상자를 낸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 남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한다. 내키는 대로 말하면 신뢰를 잃는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는 성경(야고보서 1장 19절)의 가르침도 있다. 때로는 침묵으로 말해야 한다. 자기변호를 거부하고 침묵하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침묵이나, 선승(禪僧)들의 침묵 수행에서, 그리고 자강불식(自彊不息)하며 묵묵히 일하고 있는 저 대자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오월의 대자연은 침묵 속에서 쉬지 않고 일하면서 저리도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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