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소설가 정지아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목표예요.”


정지아씨는 지난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고욤나무」가 당선돼 소설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첫 단편집 『행복』의 표제작은 출판사 ‘작가’가 61명의 소설가와 평론가에게 의뢰해 선정한 ‘2003년 가장 좋은 소설’에 뽑혔고 두번째 단편집 『봄빛』에 실린 「풍경」은 지난 2006년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다. 이 두 권의 단편집만 보면 그의 작가인생은 탄탄대로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정지아의 삶은 ‘지탄’대로였다. 그는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역사’를 어려서부터 짊어져야 했고,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전에 쓴 첫 소설 『빨치산의 딸』 때문에 모진 풍상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세상의 갖은 손가락질을 받았던 그의 표정에 한 점 구김이 없다는 사실이다.

“착실한 학생시절을 보냈고 반공글짓기에서 장원도 받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 아버지가 빨치산이더라구요.” 사회와 아버지 중 하나를 부정해야하는 고통스런 선택의 기로에서 처음에 그는 사회를 택하고 아버지를 부정했다. 선택 자체와 그 결과 모두 아픔이었지만 아팠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정지아씨는 오히려 웃고 있었다. 이 웃음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해와 용서가 필요했을까.

당시만 해도 연좌제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사를 짊어진 정지아씨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는 많지 않았고, 글을 쓰기로 결심한 그는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대학 입학 후 정지아씨는 독재정권이 은폐한 역사의 진실을 배웠다. 그가 ‘금기’이자 ‘절대악’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역사적 산물’임을 이해하고 나서야, ‘죄인’으로 여겼던 부모님도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다짐했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로 소설을 써야겠다. 아무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말해야겠다. 부모님의 역사는 곧 내 역사이기도 하니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당시 실천문학사 대표였던 이석표씨가 정지아씨에게 연재를 부탁한 것이다. 네 번의 연재 후에 『빨치산의 딸』이 세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출간 이후 세 개의 사건이 동시에 시작됐다. 이석표씨의 구속, 정지아씨의 수배, 『빨치산의 딸』의 판매금지조치. 당시 공안당국이 『빨치산의 딸』을 이적표현물로 분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석표씨는 6개월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후에야 문화유통북스 대표를 맡을 수 있었고 정지아씨는 몇 년 간의 수배생활을 겪고,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난 뒤에야 「고욤나무」를 통해 ‘소설가’ 라는 수식어를 얻을 수 있었다. 『빨치산의 딸』 역시 지난 2005년에야 두 권의 책으로 재출간됐다. 저자인 정지아가 “실록에 가까운 소설”이라고 말한 이 작품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형수씨는 “통렬한 과거사”라고 표현했다. ‘빨치산’이 혁명을 위한 무장투쟁 때문에 삶을 바치고 죽음을 맞이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빨치산에 대해 누구보다 고민해야 했고 이해해야 했던 ‘빨치산의 딸’이 썼기에 더욱 사실적이다.

정지아의 이해심은 최근 출간한 단편집 『봄빛』에서도 드러난다. 다만 이해의 대상이 ‘죽음’과 ‘소멸’로 바뀌었을 뿐. 열한 편의 소설이 수록된 단편집의 많은 부분을 기억을 잃어가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차지한다. ‘치매’와 ‘죽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대상이지만 정지아의 소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설 속 노인들은 찬란하게 아름다운 봄의 정경 속에서 기억을 잃어가고, 생명을 잃어간다. 봄의 풍경을 묘사하며 시작하는 「풍경」은 예순 살이 넘은 아들과 아흔 살이 넘은 노모의 이야기다. 죽음과 치매, 그리고 눈부신 봄이 공존하는 곳에서 그들의 대화는 천진난만하다. “내 새끼,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재미난가?” “이(응)”

정지아씨는 “소멸도 자연의 순환 속에 있는 일부라고 생각해요. 자연의 본질이죠. 기억과 생명의 소멸을 생장의 대표격인 봄볕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둘을 연결시키고 그 순환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세월」의 화자인 할머니는 ‘이녘(남편)’에게 “요리 볕 좋은 날에 볕속에 나앉아 따독따독, 이삔 기억이나 따독임시로 따순 아지랑이로나 모락모락 피어올라 이승과 작별했으먼 안 좋았겄소이”라고 말했나보다.

봄의 아름다움 속에 녹아든 죽음일지라도 이를 맞이하는 독자는 책을 한 장 넘기기가 쉽지 않다. 소설의 전개 역시 술술 읽히는 요즘 소설에 비해 느린 편이다. 이런 특징들은 그의 문학관과 닿아있다. “읽기가 힘들어 독자가 적더라도 그들과 교류하고 싶었어요. 제 글을 읽다 잠깐 멈춰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는 독자들이 있다면 전 만족해요.” 그런데 왜 하필 죽음과 소멸일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곳에 시선을 줘서 세상이 모르는 또 다른 아름다운 가치가 그곳에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요. 그래야 균형이 좀 맞지 않을까요?”

당나라의 문인 유종원은 ‘수척만물 뇌롱백태(漱滌萬物 牢籠百態)’라는 여덟 글자로 자신의 문학관을 설명했다. ‘만물을 씻어내 온갖 것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는 뜻의 이 문구는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정지아의 소설관과 통한다. 더 많은 세상과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그의 다음 소설이 어떤 것을 담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때가 되면 예쁜 조명보다는 ‘봄볕’ 아래서, 카라멜 마키아또의 달콤함보다는 오미자차의 다섯 가지 맛과 함께 느긋이 그의 소설을 음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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