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연 사회부장
한국인은 스스로 냄비근성이 있다는 말을 자주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쉽게 끓고 식는 성향이 민족성에 잠재할 이유도 근거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말이 사고를 규정짓는다”고 한 것처럼, 누군가 냄비근성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고 통용되는 순간 우리의 사고에는 냄비근성이라는 프레임이 굳어진다. 사고에 자리잡은 냄비근성은 무의식 속에 힘을 행사하는 법이다. 덕분에 한국의 역대 정권과 일부 언론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유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란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대중은 대의와 구호에 쉽게 움직인다. 구호에 정당성이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작동된 대중은 금방 지친다. 당연하다. 절박감의 무게는 개개인 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강요된 움직임은 금세 동력을 잃는다. 하지만 이는 민족성이나 냄비근성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사안의 정교함과 절박함의 정도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촛불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5월 초. (여)중?고생이 주축이 돼 청계천에 나간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 진짜 싫어요. 솔직히 못 생겼잖아요.” 인터뷰 기사에서 한 여고생이 왜 집회에 왔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냉소했다. 애들이 ‘야자’하기 싫어 뛰쳐나왔구나 싶었다. 당시 냄비근성 프레임에 갇혀있던 필자는 촛불이 금세 꺼질 줄 알았다. ‘공부나 해라 자식들아.’

냄비근성 프레임으로 톡톡히 재미 보던 자들도 같은 생각을 안 했을 리 없다. 따라서 이들은 지금 적잖이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슬슬 꺼질 때가 됐는데 왜 안 꺼지는 거지. 벌써 두달 반이다. 금강산과 독도에 가려 살짝 잊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오늘밤에도 수만의 촛불 든 사람들과, 담뱃불 마냥 촛불을 밟아 비벼 끄려는 자들이 거리로 나선다.

촛불이 지속되는 일차적 이유는 사안이 구체적이고 절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처음엔 정말 ‘그냥 생긴 게 마음에 안 들어’ 가벼운 마음으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거운 마음에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동안의 사회현안과는 너무나 판이하다. 불을 붙인 건 특정 인물도 단체도 아니다. 이유가 너무 많다. 전경에게 밟히고 물대포에 실명할 뻔한 시민들의 영상, 즉 이미지 때문이다. 경제만은 살린다 해서 뽑았더니 경제 위기 운운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친소 먹고 광우병에 걸려도 민영의료보험 때문에 치료도 못 받고 대운하에 뿌려질 것 같기 때문이다. 애초에 대의는 없었다. 나의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자생적이고 그래서 금방 식을 수 없다.

또 하나 촛불이 계속되는 이유는 현 정부가 불장난을 좋아하는 어린애처럼 솔직하기 때문이다. 소통 운운하다 안 되니 명박산성을 쌓는다. 마음에도 없는데 국민들 앞에 머리 숙이려니 기분 나쁜가 보다. 참지 못하고 얼마 후 인터넷은 독이니 친북좌파 배후세력이니 운운한다. 꺼질 만하면 기름을 붓는다. 정치적 셈도 수도 없다. 이젠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지금부터라도 진심으로 ‘국민과 소통’하는 것이다. 지난 두달 반은 전화위복의 준비기간 쯤으로 여길 수 있다. 아니, 그냥 조용히만 있어도 된다. 그러면 촛불은 저절로 꺼질지도 모른다. 그때 가서 촛불 역시 냄비근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해도 눈감아줄 수 있다. 뭐든 하는 족족 제대로 하는 게 없으니 불안할 따름이다. 촛불 시위 현장에서 들었던 구호가 하나 떠오른다. “공약을 지킬까봐 무서운 건 네가 처음이다.” 촛불 끄려고 뭔가 하다간 크게 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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