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올림픽 특집 인터뷰

사진: 황율리 기자
사진: 황율리 기자
장장 17일간의 경기를 끝내고 대단원의 막을 내린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13개, 종합순위 7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대한민국 대표팀이 금의환향했다. 박태환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했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올림픽 수영에 참가한 서울대의 유정남씨, 그리고 태권도 대표팀 감독으로 금메달 4개를 일궈낸 김세혁씨. 이 둘을 만나봤다.

유정남 선수 (체육교육과ㆍ02)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금빛’ 물살을 가르고 ‘금빛’ 과녁을 꿰뚫고 ‘금빛’ 발차기를 날린다. 그러나 메달을 따지 못한 많은 선수들의 땀방울은 휘황한 금빛에 가려져 잊혀진다. 올림픽에 출전한 두명의 ‘서울대생’, 남유선 선수(여자 개인 400m 혼영 출전)와 유정남 선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의 땀방울도 금메달 못지 않게 값지다. 이번 베이징올림픽 200m 접영에 출전한 유정남(체육교육과ㆍ02) 선수를 만났다.

유정남 선수에게 베이징올림픽의 의미는 각별하다. 선수촌에서 20년 가까이 생활했고 5년 가까이 대표팀에 있었지만 올림픽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번번이 운이 따라주지 않은 것이다. 수영을 그만두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도전해보자’는 심정으로 지난 1월, 국가대표 선발전 출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4월에 열리는 선발전까지는 불과 두달 반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러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자 온몸에 힘이 솟았다. 결과는 하늘의 뜻에 맡기고 최선을 다해 선발전을 준비했다. 단기간의 훈련이었지만 집중력을 발휘해 그는 그토록 바라던 올림픽 출전 티켓을 거머쥐었다.

“감회가 남달랐어요. 제가 수영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나이가 두번째로 많아요. 그런데 다른 세계대회는 많이 뛰어봤지만 올림픽 출전은 처음이거든요. 국내에서는 편안한 기분으로 시합했는데 올림픽은 규모도 크고 분위기도 낯설어서 긴장이 많이 되더라고요.”

유정남 선수는 올림픽을 준비하며 국가대표 선발전에 쏟아 부었던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지난 6월초에 들어간 태릉선수촌에서의 하루는 일반인의 일상적 하루와 그 밀도가 달랐다. 하루 8시간 반의 고된 훈련, 주말에만 주어지는 ‘반짝’ 자유. 숫제 군대에 다시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침 7시 반에 기상, 9시부터 12시까지 수영 연습, 1시부터 3시까지 웨이트트레이닝, 8시 반까지 또 수영 연습. 그야말로 운동만 했죠. 친구들 만나고 저녁에 가볍게 술자리를 가질 여유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었어요. 주말을 제외하고는 외박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외롭고 힘든데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답답했어요.”

훈련기간에 비해 결과가 좋았던 것 같다는 말에 유정남 선수는 “올림픽 나가기 전까지만…”이라며 멋쩍게 웃었다. 각 나라에서 200m 접영을 가장 잘 한다는 44명이 출전한 올림픽 수영대회. 유정남 선수는 2분 01초로 34위에 그쳐 예선 탈락했다. 유 선수의 경기는 같은 시간대에 있었던 남현희 선수의 펜싱 결승전에 가려 텔레비전에 방영되지도 못했다. 유정남 선수는 “우리나라 방송국이 원래 중요 경기만 방영하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오히려 방영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시원시원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 베이징올림픽 수영종목에서 한국은 값진 메달을 두개나 따며 크게 선전했다. 그 ‘금은빛’ 물살의 주인공인 박태환 선수는 온 국민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유정남 선수가 선수촌에서 훈련했던 지난 2005년,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 선수는 그의 룸메이트였다. 그는 박 선수가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선배로서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러움을 표했다.

“같은 수영선수로서 솔직히 부럽죠. 메달도 따고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하지만 박태환 선수가 메달을 목표로 수영하는 것처럼 저에게도 저 나름의 목표가 있어요. 제 기록을 조금씩 줄여나가면서 성취감을 느끼는 거죠.”

유정남 선수는 200m 접영 한국신기록 보유자다. 그의 최고 기록은 1분 58초. 2005년 마카오동아시아경기대회 접영 200m 3위, 2003년 동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대학부 접영 100m 우승 등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나비처럼 물살을 가르는 그에게 접영은 주종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접영을 하고 있으면 ‘내가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돼요. 선수들은 보통 수영을 하는 중에도 좋은 기록을 냈던 경험이나 시합 후 누리게 될 자유 등에 대해 잡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접영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잡생각이 사라지고 수영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돼요.”

앞으로는 서울대 소속 선수로 대회에 출전하는 유정남 선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졸업과 동시에 ‘전남수영연맹’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 그는 런던올림픽도 열심히 준비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메달에는 색깔이 있지만 선수들이 흘린 땀방울은 모두 투명하다. 비록 유정남 선수가 예선 탈락했지만 그의 ‘금빛’ 투혼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김세혁 감독 (삼성에스원 태권도단)

“어어이! 어어이!” 기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태권도장. 10여명의 선수들이 쉬지 않고 발차기 훈련을 하고 있다. 그 사이로 머리가 하얗게 센 감독이 코트 위를 돌아다니며 선수들을 지도한다. 지난달 28일,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 맹활약한 태권도 국가대표팀 김세혁 감독(삼성에스원 태권도단ㆍ53)을 삼성에스원 태권도장에서 만났다.

이번 올림픽에서 태권도에 출전한 네 체급의 선수들은 모두 금메달을 하나씩 목에 걸고 돌아왔다. 출전한 체급 모두를 석권하는 신화를 쓴 것이다.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래로 가장 좋은 성적이다.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김 감독은 ‘전담코치제’를 꼽았다.

“같은 팀 소속의 선수들을 맡아서 지도하는 전담코치제의 도입을 대한체육회에 건의했어요. 코치가 오랫동안 같은 팀에서 생활한 선수를 전담하게 되면 그 선수의 장단점을 이미 파악한 상태니 능률도 더 오르지 않겠어요. 대한체육회에서 이 건의를 받아들여 경희대의 임수정 선수, 한국체대의 황경선, 차동민 선수, 삼성에스원의 손태진 선수를 각각 전담할 수 있도록 코치 3명을 배정했습니다. 코치들이 같은 소속팀 선수들을 부모된 마음으로 지도하다 보니 좋은 성적을 낸 것이죠.”

삼성에스원 태권도단 소속인 김세혁 감독은 손태진 선수의 지도를 맡았다.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은 만큼 손 선수에 대한 김 감독의 애정은 각별하다. “이건 거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죠. 태진이가 88둥이, 스무 살이니까 막둥이도 이런 막둥이가 없죠. 껄껄.”

손태진 선수는 금메달이 확정되자 아버지 품에 안겨드는 어린 아들처럼 김 감독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김 감독은 손 선수를 부둥켜안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손 선수가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 자리에 서기까지 모든 과정을 지켜본 김 감독이었다.

“태진이가 국가대표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실업선수는 대학에 적을 둘 수 없다’는 대한체육회 규정 때문에 다니던 대학도 그만둬야 했고요. 시합 나가서도 우여곡절이 많았죠. 결승전에서 4초 남기고 넘어진 거예요. ‘태진아, 태진아! 이제 마지막이다. 일어나라. 왼발 옆구리 한 방이다!’ 그 1초 남기고 날린 발차기가 득점으로 연결돼 극적으로 금메달을 따냈어요. 약관의 어린 선수가 그렇게 힘들게 이기고 울면서 뛰어오는데 그 기뻐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구요.”

경기장에서는 한없이 울던 김세혁 감독. 하지만 그는 스스로 강하고 독한 감독이라고 말한다. 태권도계에서도 김 감독은 카리스마를 지닌 용장(勇壯)으로 통한다. 그는 선수들에게 매일같이 태백산과 함백산 정상을 오르는 고된 훈련을 시킨다. 기합소리에 힘이 없으면 즉각 떨어지는 서릿발 같은 호통도 선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하지만 그 무섭던 ‘호랑이 감독’도 훈련이 끝나면 자상한 ‘코치아빠’로 돌아온다. 올림픽을 10일 앞두고는 매일 아침 손수 김치찌개를 끓여서 선수들 밥을 먹였다. 또 긴장하는 선수들에게 ‘배운 대로, 연습한 대로만 하면 반드시 이긴다’며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그가 태권도 인생 30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조금 남다르다. 초등학생 때 싸움 잘 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김세혁 감독. 어느 날 김 감독과의 싸움에서 진 아이가 태권도 도복을 입은 중학생 형을 데리고 왔다. “야! 네가 우리 동생 때린 놈이냐?” 어린 김 감독은 그 형의 돌려차기 한 방에 엉엉 울어버렸다. 어려서부터 승부사 기질이 강했던 김 감독은 ‘태권도를 배워서 저 형을 꼭 이기겠다’는 다짐으로 태권도부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300원짜리 도복을 입고 붉은 황토 바닥에서 지르기 연습을 하며 태권도 실력을 갈고 닦았다. 김 감독은 “나중에 그 형을 혼내주려고 찾아가봤지만 이사 가고 없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런던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팀을 맡을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김세혁 감독은 후배들에게 감독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일선에서 물러나 조언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아울러 그는 세계 태권도의 수준이 평준화된 상황에서 한국 태권도의 앞날을 걱정했다.

“이번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 4명 모두 간발의 차로 금메달을 땄어요.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지게 이길까’를 생각하던 시절은 이미 옛날이야기가 됐죠. 국민들도 ‘메달 따면 본전, 못 따면 역적’이라는 식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여기서 안주하면 런던올림픽에서의 선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국기 태권도에 국민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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