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22차 세계철학대회 참관기

엄정식 교수

동서 고금 철학의 조우

“오늘의 철학을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Philosophy Today)’라는 전체 주제 아래 제22차 세계철학대회가 지난 8월 초에 서울에서 열린 바 있다. 100년이 넘게 지속된 이 대회가 처음으로 동양에서 개최됐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겠지만, 현대인이 지닌 모든 문제가 집약된 것 같은 한국의 아고라에서 논의된다는 것은 단순한 국제 학술 대회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 그리고 삶의 진실에 관하여 넓고 깊게 탐구해 온 철학이라는 학문은 물질문명과 정신문화를 형성해 온 지역에서라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 왔으며 그 심오성의 정도에 따라 문명과 문화의 수준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어왔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가 다룬 분야는 방대하다. 전체 강연에서는 현실문제와 관련하여 “도덕철학, 사회철학, 정치철학’이 다루어졌고, ‘형이상학과 미학’이 새롭게 조명되었으며 시대적 특징과 관련하여 ‘인식론, 과학철학, 기술철학’이 비중 있게 논의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사와 비교철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이 대회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그밖에도 ‘갈등과 관용’, ‘세계화와 세계시민주의’, ‘생명윤리, 환경윤리, 미래 시대’, ‘전통, 근대, 탈근대’, ‘한국철학’등 5개의 주제로 묶인 심포지엄과 기금 강연, 헌정 강연, 한국 철학회 모임 등 70개가 넘은 라운드 테이블이 준비되었다. 현대 철학의 모든 쟁점이 원탁에 올려진 셈이다. 이것이 88개국에서 2000여명이 참가한 것을 염두에 두면 충분히 ‘철학 올림픽’이라고 불릴 만하다.

‘철학 올림픽’이란 말은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업적을 아킬레우스의 무용담과 비교하여 스스로 영웅임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올림픽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으며 깨어질 기록도 없고 새로 세워진 기록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색깔이든 메달도 없다. 거기에는 다만 문제의 제기가 있고 좀 더 심화된 문제가 있으며 새롭게 다듬어진 문제가 있을 뿐이다. 복잡한 논의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이 더욱 선명해지고 그 과정에서 우리들 자신의 정체와 상황이 어느 정도 확실해 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성과일 것이다.

많은 논의가 전개되었지만 그것은 결국 동서와 고금의 철학이 조우한 기회였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회를 좀 더 야심적으로 표현한다면 조직위원회의 이명현 의장이 함축적으로 지적했듯이 “자연과의 화해, 그리고 문화의 장벽에 갇힌 타인들을 화해로 인도할 통합적 사고의 창출”을 의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고의 창출은 철학이 수행할 수 있고 또 철학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러한 시도가 이번 대회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자연과의 화해

우선 자연과의 화해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현대를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생겨났고 또 끊임없이 발전해 왔지만 그 탐구의 성과인 기술은 오늘날 문명의 이기를 생산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운행의 법칙을 훼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을 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나는 개념적 혼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생존에 관한 가치의 문제이다.

개념적 혼란의 문제란 과학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전통적으로 철학이 활용해 오던 ‘기초 개념’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인간과 동물, 정신과 물질, 시간과 공간, 생명과 죽음, 자유와 필연, 그리고 선과 악 등을 구분하는 기준이 모호해졌고 따라서 이 개념들을 규정할 근거가 희박해졌다는 것이다. 이제 철학자들이 이러한 점을 의식하지 않고 사유의 체계를 정립한다면 그 결과는 일종의 망상이거나 허구의 그물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그 위상이 흔들리고 신의 피조물로서의 존엄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구나 이른바 ‘초인간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심지어 진화의 사슬로부터 새로운 차원의 종으로 도약시키려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지적 탐구의 결과이므로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도 없고 또 막아서도 안된다. 이것이 곧 자연과의 화해에 관한 철학적 문제이다.

그 예로 김재권 교수(미국 브라운대·철학과)는 전체 강의에서 정신현상에 관한 존재론적 위상을 새롭게 규정하고 물리주의를 근거로 물리학이나 화학과 같은 보편 과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생물학, 천문학과 같은 특수 과학에도 엄격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신 현상은 뇌라는 물체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음이 더욱 확실해지고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 의지 등은 새롭게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문명과의 화해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실적인 차원에서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인간의 세계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축소되어 하나의 지구촌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농업문화는 상업문화로 교체되고 상업문화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형태로 발전하여 서구를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치제와 대중적 문화형태로 변모되어 지구촌이 이른바 ‘세계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특히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이식은 정치와 경제의 영역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서 심각한 분쟁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어서 마침내 지구촌의 세계화와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결이라는 보편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이른바 ‘문명과의 화해’를 요구하는 철학적 문제인 것이다.

알렉산드로 추마코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는 ‘근대성의 맥락에서 본 세계화와 세계시민주의’라는 논문에서 세계화와 민족주의를 연결하는 역할을 철학자들이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세계화가 아무리 진행되어도 지역별 혹은 나라별로 다양한 문화와 이해관계가 얽힌 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문화 간의 충돌을 완화하고 이해를 높이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독특한 그의 철학관이 있다. 그것은 바로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마르크스의 견해이기도 하다.

철학의 책무는 문제의 심화

많은 이유로 훌륭한 행사였기는 하지만 알랭 바디우나 하버마스와, 힐러리 퍼트넴과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개인적 사정으로 좀 더 많이 참석할 수 없었다는 점과 동서양의 철학적 전통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인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흔히 철학자들은 문제를 제기하고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더구나 해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 하지 않는다. 비록 더욱 큰 혼란을 야기 시킨다고 해도 문제를 다만 심화시킬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소크라테스 이래로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주로 해온 일이며 그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서울 대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장소를 어디로 옮기든 철학자들은 철학을 할 뿐이다. 만약 여기서 동서양 철학의 교류가 있었다면 철학적 방법이나 내용의 교류가 아니라 현대가 당면한 철학적 문제의 공유를 통해서만 가능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특별히 서울 대회에 의미가 있었다면 그 문제들이 여기에 집약되어 있어서 그것을 실감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제 5년 후면 이 대회가 서양철학의 발생지인 아테네에서 열릴 것이다. 거기에서도 여전히 철학자들은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새롭게 제기된 문제는 소크라테스의 것과 분명히 다르고 더 심도 깊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엄정식 교수
서강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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