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현태 교수(인문대 노어노문학과)

최근 ‘세계적인 대학’이 화두다. 서울대를 세계 100위권을 넘어 10위권 내로 진입시키겠다는 로드맵이 발표되고 또 실천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 로드맵을 보고 있으면 70∼8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떠올리게 된다. 주지하듯이 한국의 70∼8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은 성과도 컸지만 부작용도 작지 않았다. 1997년의 IMF나 사회적 양극화는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도 경제 성장 가운데 수많은 개인적인 희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대학이라는 목표설정 자체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다. 한국 사회의 발전 기반이 다름 아닌 인적 자원의 높은 질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볼 때, 한국의 대학은, 무엇보다도 서울대는 일류 대학을 넘어 초일류 대학을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세계적인 대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다. 동어반복이 되겠지만 대학의 핵심 기능이 연구와 교육이라면 결국 세계적인 연구 성과와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이 세계적인 대학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 다 개인의 노력을 넘어서서 어떤 시스템을 요구한다.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에 대해서만 말해보기로 하자. 이 역시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 한국의 대학들과 관련해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을 말하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강의의 50% 가량을 담당하는 시간강사의 존재다. 대학에서 이뤄지는 교육이 강의로 한정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강의가 대학 교육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라는 사실을 감안해본다면 현재 한국에서 시간강사는 대학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그런데 대학교육의 절반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 시간강사에 의해 좋은 교육이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학구성원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시간강사는 두 가지 뜻을 가질 수 있다. 전임교원에 비교해서 그들은 ‘비전임교원’으로, 즉 한시적으로 고용되어 일을 한다. 한편, 그래서 그들의 노동은 ‘시간’으로 측정된다. 시간강사의 노동의 대가인 시간강사료는 그들이 실제로 한 강의시수에 의해 지급된다. 이러한 형태의 임금이 우리에게 낯선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비정교직 노동이나 소위 ‘아르바이트’라는 형태의 노동에 대한 대가가 이러한 방식, 즉 ‘일한 시간당 얼마’의 형태로 지불된다. 그런데 시간강사의 노동이 이러한 형태의 노동과 동일한가?

시간강사 문제가 등장하면 늘 언급되는 것이 시간강사료의 현실화다. 정말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대학교육의 50%를 담당하는 시간강사들을 소위 ‘아르바이트 학생’과 동일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시스템 하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이 이뤄질 수 있을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개인의 희생이 시작된다. 현재 시간강사에 의해 이뤄지는 ‘좋은 강의’는 시간강사 개인의 희생 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간강사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이 없다면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이란 공허한 수사가 되기 쉽다. 서울대가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육의 한 중요한 담당자인 시간강사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있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 더 끔찍한 것은 시간강사들의 희생 위에서 서울대가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이 돼 버리는 것이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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