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를 다시 보게 된 것은 그의 공판정에서였다. 그는 북한 노동당의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는 혐의를 받아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내가 독일 유학 시절 잠깐씩 대면한 적이 있을 뿐 나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할 그의 공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36년 만에 자기 발로 찾아온 고국에서 겪는 운명에 뭔가 서글픔을 느껴서였다. 그는 귀국 당시 언론의 열광적 조명을 받더니, 어느 순간 북한 공작금을 받아 남한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간첩으로 몰리면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3개월이 넘게 진행되고 있는 공판과정 속에서 그는 잊혀진 인물이 되어 있다.

실제로, 그의 귀국 후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실들에는 당혹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북한 방문이건 노동당 가입이건, 철학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공개하고 이를 세계관에 입각하여 당당히 설명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그는 여론의 몰매를 맞았고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적지 않은 지인들까지 등을 돌렸다. 소위 현실감 없는 태도에 대해 그는 지식인으로서 벌을 받을 만큼 받은 셈이다. 

그런데 국가가 지금 막상 재판하고 있는 것은 그의 행동의 공개성 여부가 아니다. 그가 냉전 상황에서 북한에 극히 적대적이던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을 이해시키고자 하였고, 따라서 북한사회를 옹호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은 그의 책에 공개적으로 드러나 있다. 문제는 공개되지 않은 정치적 행적뿐 아니라 만천하에 공개된 그의 사상과 학문방법론에 대해서까지 국가가 단죄하려 든다는 데 있다. 내가 참관한 공판에서는 주체사상 신봉자였다가 전향한 한 인물이 검찰측 증인으로 나와 송 교수의 저작이 남한 주사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던가를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증언하고 있었다. 그는 송 교수가 저서에서 내재적 접근법을 적용함으로써, 북한의 문제점은 비판하지 않고 북한체제를 옹호하기만 했다며 송 교수를 맹렬히 비난했다. 국가보안법 자체가 폐지되어야 할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 형사법정에서는 한 사회나 개체를 그 자체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방법론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고 있었다.  

정치적 행적이 아닌 학문방법론에 대한 단죄 행위 

한반도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라는 논의의 틀이 확립되었고, 적어도 남북한 국민들 사이에서는 상호이해와 협력을 갈구하는 정신이 뿌리내려 가고 있다. 증오하고 대립하던 두 집단 사이에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다면 양쪽 모두를 위해 그보다 더 큰 승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같은 분위기는 남북한 정책결정자들의 구상 덕분에만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귀환 후 수감될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악착같이 북한을 다녀오고, 그 곳도 사람 사는 곳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곳 사람들과 공존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외쳐댔던 임수경, 황석영, 문익환이 그 동안 남한 사람들의 빨갱이 공포증을 완화시켜 놓지 않았더라면 햇볕정책인들 남한 주민들 사이에서 과연 그리 쉽게 받아들여졌을까? 재외인사로서 이 같은 북한 방문자들의 대열을 일찌감치 선도하여, 고국 사람들에게 우리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삽시다라고 간곡하게 말 건넸던 사람이 송 교수가 아니었던가? 그의 북한관에 오류가 있다 해도 이는 재판이 아니라 토론의 대상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린 시절 어느 외국 문인의 산문시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참 인상적이었다.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였던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통해 페르시아 원정군을 격퇴하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이다. 해전의 전야에 격론이 벌어졌을 때 그는 논쟁 상대에게 말했다. 날 때려라. 그러나 내 말을 끝까지 들어라. 세인에게 잊혀진 채 서울 구치소의 차가운 독방에 수감된 노교수는 이렇게 독백하고 있지 않을까? 당신들은 내 말을 들었소. 그러나 아직도 날 때리고 있소.

한정숙 인문대 교수ㆍ서양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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