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많이 놀라셨어요? 작년 가을에 졸업한 학번 OOO입니다. ” 지난 설 전날, 조그만 상자속의 먹음직스런 사과와 함께 배달된 예쁜 카드의 이면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분명히 잘 기억되는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이름과 외양의 분별에 일시적인 혼돈이 일어난 것은 선물은 주는 이가 받는 이에게 특별히 감사해야할 일이 있어야 한다는 내가 가진 일반적 통념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학생이 내게 감사해야 할 일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담당한 2∼3개 강의를 수강했던 학생. 수업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시험 준비와 숙제, 그리고 팀 프로젝트를 성실히 수행했던 학생. 결국 좋은 성적을 받았던 학생.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측면보다는 우리 전공과는 별 상관없는 서양미술사에 더 관심이 많아 복수 전공했던 학생. 결국 5년 만에 졸업하여 전공교수로서는 약간의 부정적(?) 이미지가 더욱 강한 학생. 지난 연말 사은회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전공의 특성을 살려 좋은 금융기관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어 의아해 했던 학생.

약 6년 전 서울대학교에 온 이후 한 축하모임에서 대학 동창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세상에 너만큼 행복한 X이 없다.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득천하영재(得天下英才)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그것보다 신나는 일이 어디 있냐”며 2차 술값을 내라고 닦달하던 친구다. 무식을 드러내고 그 뜻과 배경을 물어보니 한자와 그 의미를 되새겨주며 천하의 뛰어난 인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 맹자(孟子)에 나오는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셋째 즐거움이란다. 아울러 서울대학교에 가서 가르치려면 고생 좀 하겠다는 핀잔과 함께.

교수가 된 뒤 得天下英才의 실천과 무식을 벗으려고 孟子 공부를 좀 했더니 교육에는 5가지 양상이 있단다. 제 때에 내리는 비가 초목을 저절로 자라게 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化之), 덕을 이룩하게 해 주는 것(成德), 재능을 발달시켜 주는 것(達財), 물음에 답해주는 것(答問), 혼자서 덕을 잘 닦아나가도록 해 주는 것(私淑) 등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모든 것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핑계를 대고 2가지만 한 번 해보자 한 것이 답문(答問)과 사숙(私淑)이다. 화지(化之)는 서울대학교 환경이 해줄 것이고, 성덕(成德)은 자신 없고, 달재(達財)는 기본이 완성된 학생들만 있으니 문제없고, 답문(答問)은 기본이고 사숙(私淑)은 교육과 연관하여 잘하면 내가 할 추가의 역할이 아닐 까 생각했다. 지난 6년을 자문해보니 私淑은 커녕 기본적인 答問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 학부과정에서 학생들과의 교류는 수업시간과 신입생환영회 등과 같은 의례적 행사에 국한되어 왔다. 또한 내가 하는 학문에 관심 있는 일부 학생들 특히 대학원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것도 사실이다.

“회사 다니면서 종종 생각나서요. 즐거운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로 끝나는 이 학생의 편지는 서울대학교에 온 이후 나의 교수 역할에 대한 반성의 단초였다. 가장 기본인 答問에 대한 준비는 제대로 했는지. 혹 成德은 지금부터라도 불가능한지. 매번 국제학술회의와 겹친다는 핑계로 한 번도 참석 못한 신입생 새터도 이번에는 꼭 참석해야겠다. 나에게 成德의 방법을 실천적으로 교수한 ○○○학생의 졸업 축하를 위해 나도 선물을 준비해야겠다. 감사할 일이 생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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