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 10권 중 5권 출간된 발터 벤야민 선집

홍익대 예술학과
아우라가 느껴지는
아우라의 전도사

‘아우라(Aura)’라는 말이 있다. 여전히 다소 현학적인 냄새를 풍기지만 오늘날 이 말은 일상 속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저명한 예술가나 예술작품이 지닌 독특한 스타일을 지칭하기 위해 ‘아우라’를 얘기하는가 하면, 대중스타가 발산하는 강한 매력,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분위기를 상찬하기 위해서도 자주 ‘아우라’가 동원된다. 또한 미술비평이나 전문 학술지의 제목은 물론, 심지어 약간 고급스런 카페 이름에도 이 말이 쓰인 지 오래다. 그런데 본래 성스러운 대상을 둘러싼 ‘영적 기운(氣韻)’ 내지 ‘광휘(光輝)’를 뜻하는 이 말이 이렇게 일반화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상가가 바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다. 벤야민은 ‘아우라’를 자신의 예술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는데, 1960년대 후반 서구에서 그의 사상이 활발하게 수용되기 시작하면서 ‘아우라’ 또한 널리 확산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성완 교수(한양대ㆍ독어독문학과)가 그의 주요 에세이들을 편역한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1983)을 출간한 이래 아우라가 학문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벤야민이란 사상가 자체가 우리에게 ‘아우라’와 흡사한 상태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유물론과 신학을 결합한 사상가’, ‘독특하고 비의적인 문체주의자’, ‘비극적 상황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문필가’, ‘섬세하고 탁월한 문예비평가’와 같은 인상들이 ‘모호한 안개’처럼 그와 그의 사상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아우라에 대한 시적이며 은유적인 묘사를 감상하는 일과 아우라가 지닌 ‘이론적 위상’을 예술철학적으로 엄밀하게 규정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벤야민을 둘러싼 아우라, 그에 대한 분위기적인 이해와 그를 철학자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일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인 그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도전적이고 생산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분과학문 벽 넘어서
진리 내용 인식하라

벤야민의 신호는 이렇게 우리를 일깨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정으로 현재적인 철학적 사유와 글쓰기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결코 전승된 ‘고전적 사상가들’을 반복하거나 그들에 대해 주석을 다는 일에 머물러선 안 될 것이다. 실증적 분과학문의 여러 방법론들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그들 사이를 어설프게 절충하고 통합하는 일도 될 수 없다. 반대로 그것은 자신의 역사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 즉 철학적 사유의 대상과 방법론이 처해 있는 현재적 상황을 근본적이고 치밀하게 반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자 통로인 ‘언어’에 대해 역사(철학)적으로 치열하게 반성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특히 그것은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급격한 정치경제적 및 사회문화적 변동을 직시하고, 이 변동이 가져온 사상적 충격과 함축을 충분히 음미하고 이론적으로 소화해내야 한다.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 푸코와 같은 급진적인 비판가들이 보여주었듯이, 현대의 철학적 사유는 인간의 의식과 정신을 역사와 문화의 원천으로 소박하게 신뢰하는 휴머니즘적-의식철학적 입장을 전면적으로 회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립적이고 자율적인 듯 보이는 의식과 정신이 그 본질과 생성에서 물질적 현실과 깊숙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체적인 ‘이념’이나 ‘본질 직관’에 기대기보다는 지각, 환영, 의식,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물질적인 변화와 표면적인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 역사적 의미 혹은 이데올로기 비판적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훨씬 더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이를 위해 철학적 사유와 글쓰기는 백화점식 분과학문의 벽을 단호하게 거스르고 가로지르면서 과거와 현재, 역사와 구조를 아우르는 비판적인 역사인식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은 예술형식과 문화현상 속에 표현되어 있는 지난 시대의 이미지와 현재의 이미지를 새롭게 충돌시킴으로써 과거 이미지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진리내용을 발굴해내고, 동시에 현재의 급박한 실천적 위기와 가능성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이다.”

충실한 해제와 주석
돋보이는 노작

이제 우리도 이러한 신호를 분명하게 수신하고 그에 응답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를 갖게 되었다. 총 10권으로 기획된 『발터 벤야민 선집』이 올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화여대 독어독문과 최성만 교수를 중심으로 김영옥, 윤미애, 황현산 등 모두 4명의 전문가가 번역에 참여한 이 선집은 여러 측면에서 획기적이다. 우선 그것은 독일에서 1972년에 시작되어 1999년에 완간된 전집을 바탕으로 벤야민의 사유의 궤적을 10가지 핵심적인 주제로 묶어 각각의 대표적인 에세이들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전집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정도면 비판적 문필가로서 벤야민이 주목한 거의 모든 모티브와 문제의식이 망라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선집은 반성완 교수의 편역 이후의 국내 번역 성과를 적극 감안하는 ‘미덕’을 발휘했는데, 그 때문에 이미 발간된 『독일 낭만주의의 비평 개념』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그리고 곧 따로 출간될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의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 선집이 지닌 또 다른 장점은 번역자가 각 권의 앞부분에 신뢰할 만한 내용을 담은 해제를 덧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발간된 5권의 해제는 - 특히 1권 『일방통행로』와 5권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대한 해제가 돋보이는데 - 모두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어지는 텍스트의 위상과 지향점, 핵심 논점과 어려움에 대해 균형 잡힌 오리엔테이션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벤야민 자신이 붙인 원주와 함께 글의 이해를 위한 번역자 주를 적절히 안배하여 첨가한 점도 칭찬해주고 싶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각권의 말미에 용어와 인명 색인이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린드너(B. Lindner)가 편집한 『벤야민 핸드북(Benjamin Handbuch)』이나 슈타이너(U. Steiner)가 쓴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같은 훌륭한 ‘지침서’들을 활용하여 주요 연구 성과에 대한 서지를 첨부해 주었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이 선집이 앞으로 연구사적으로 또 사상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바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결함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선집은 한편으로 국내 벤야민 연구가 한차원 심화되고 문예학, 예술이론, 예술철학의 이론적 전망이 풍부해지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 철학적 사유와 글쓰기에 대한 반성과 모색에 생산적이고 도전적인 자극을 줄 것이다. 물론 이 자극이 어떠한 흔적을 남기고 또 어떤 새로운 사유의 확장을 가져올지는 전적으로 독자와 연구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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