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탄생 … 미숙아로 태어날 지도

국가연구지원 체계의 전반을 관리하는 2조 5천억원(2008년 기준) 규모의 거인이 첫발을 내딛으려 한지 반년이 지난 지금, 거인은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지난 3월 20일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 한국과학재단(과학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을 통합해 연구지원 체계를 일원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과부는 6월 19일 ‘한국연구재단법’을 입법예고했고, 공청회, 학술단체의 토론회 등이 열리며 각계에서 본격적인 한국연구재단(가칭) 출범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한국연구재단 통합 안은 8월 26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제2차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포함된 상태다.

◇한국연구재단이란?=정부 안에 의하면 한국연구재단은 ‘기초연구지원시스템의 효율화와 선진화’라는 원칙 아래 △연구지원의 수요자 중심 개편 △지원체계 일원화 △관리제도의 전문성 및 효율성 제고 등을 통해 ‘기초원천연구의 창조적 역량 극대화’, ‘지식기반사회 성장잠재력 확충’, ‘과학기술 5대 강국 조기 구현’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조직체계는 비상임 이사회와 총장이 나뉘는 구조로, 지배와 경영의 분리를 통해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사업은 크게 기초연구본부(이공학), 인문사회연구본부, 국책연구본부, 대학연구진흥본부, 전략기획본부, 국제협력센터 등으로 나뉘어 추진된다.

◇졸속 행정, 인문계 홀대, 학문의 자율성 침해 등 우려 계속 제기돼=한국연구재단설립 안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충분한 검토와 계획 없이 진행된 점’을 우선 꼽았다. 황영호 교수(군산대ㆍ행정학과)는 “준비과정에서 드러난 한국연구재단의 모습은 단순히 해당 기관들의 기능을 물리적으로만 취합하고 단순화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오세정 자연대 학장 역시 “기관의 통합을 넘어 정부의 학술연구 지원정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결여돼 아쉽다”고 말했다.

인문사회계열 학자들은 이번 안에 대해 “한국연구재단이 인문사회계열을 홀대한다”고 비판한다. 한국연구재단 설립이 학문의 특성을 무시한 채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성택 교수(고려대ㆍ철학과)는 지난 5월 29일 열린 공청회에서 “이공학을 지원하는 기초연구본부는 13개 연구단인데 비해 인문사회연구단은 5개로 구성돼 인문사회분야가 서자 취급을 받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한국연구재단이 ‘선진화’, ‘효율성’이라는 정책 목표 아래 실용성을 최우선 목표로 한 과학기술 연구 지원으로 편향될 위험성이 다분하다”며 우려를 표했다.

한국연구재단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연구관리자(PM; Program Manager)제도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사회과학분야중점연구소협의회장 장상환 교수(경상대ㆍ경제학과)는 “PM제도 도입은 불가피한 것”이라면서도 “인문사회계열과 이공계열의 평가기준을 이원화하는 등 평가방법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현재처럼 성급하게 PM제도를 도입하면 정부의 입장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PM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인문과학연구소협의회, 사회과학분야중점연구소협의회,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등 3개 단체는 “‘연구재단’ 설립 계획이 충분한 사전 검토 없이 추진되는 가운데, 그 기본 취지와 추진 절차·내용 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연구재단 설립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견서를 8월 20일 교과부에 제출했다. 학단협 상임대표 서유석 교수(호원대·교양학과)는 “법안이 국회로 넘어오는 시점에 법안을 다시 검토한 후 학자들과 국회의원들이 참가하는 토론회를 개최해 의견을 모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교과부, “각계 의견을 수합해 통합할 것”=교과부는 이러한 각계의 비판에 대해 “충분한 검토와 의견 수합을 통한 조정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밝혔다.

교과부는 인문사회 연구단보다 이공계 연구단이 더 많은 조직 구성에 대해 “현재 학진과 과학재단의 의견을 수합하는 중”이라며 “해당학문의 특성을 살려 연구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재구성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현재 교과부 내에서는 태스크포스(TF)팀이 구성돼 조직 체계를 비롯해 한국연구재단 통합과 관련된 실무적인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통합을 담당하고 있는 교과부 연구정책과 노경원 서기관은 논란이 되고 있는 PM제도에 대해 “PM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다각도로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교과부는 현재 9명으로 계획된 PM을 수십명으로 늘리고 장기적으로는 수백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현재 한국연구재단법 안은 실무적 측면의 최종단계인 법제처 심사 과정에 있다. 법안이 9월말 법제처를 통과하면 10월 중 국회로 이동돼 늦어도 12월에는 법안이 공포될 예정이다. 교과부는 법이 통과된 후에도 3개월간 공식적인 준비 과정을 거친 후 내년 3월 경 한국연구재단을 본격적으로 설립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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