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서의 현재

네르멘 샤이크 지음┃김병철 옮김┃모티브 룩┃400쪽┃2만3천원

저온 지역은 어둡게, 고온 지역은 밝게. 적외선 지도가 열의 세기로 세상을 파악하듯 지도에는 세계를 보는 관점이 나타나 있다. 세계의 권력지형도인 『역사로서의 현재』는 제국주의, 식민주의의 잔재, 경제적 불평등 등과 같은 현안이 현재 국제정세를 만들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책은 소축척지도처럼 거시적으로 세계경제 등을 논의하기도 하고, 대축척지도를 보듯 각 국가 내부에 형성돼 있는 불평등을 세부적으로 파헤치기도 한다. 또 책은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돼 전문 개념이나 주요 논의내용을 이해하기도 쉽다.

빈곤 문제를 연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은 경제논리로만 설명되곤 하는 ‘개발’ 개념을 비판한다. 그는 “개발이란 단순히 경제의 성장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능력을 확대시켜 궁극적으로는 자유가 확대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저개발 국가=저소득 국가’라는 공식을 무너뜨린다. 소득은 자유에 기여하는 하나의 요소일 뿐, 반드시 자유를 확대시킨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개발 과업이 위임된 기구들, 가령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이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개발’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 국제기구는 ‘나라들 간 힘의 제도화된 비대칭’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강대국의 논리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즉, 미국인이나 유럽인은 IMF 총재가 될 수 있지만 에티오피아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강대국이 주도권을 지닌 세계은행과 IMF는 경제적 곤란을 겪는 국가에 더 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인도의 정치학자 파르타 차테르지(Partha Chatterjee)의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논의는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을 준다. 그는 “민족주의는 식민주의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 서구의 지식구조로부터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민족주의 운동은 여전히 서구식 현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의 지배자를 대체할 것이 아니라 지배의 형식을 대체할 것을 주장하고, 그 사례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제시한다.

이슬람은 인권과 양립할 수 없다는 편견을 비판하는 이란의 시린 에바디(Shirin Ebadi)의 인터뷰도 흥미롭다. 그는 “문명충돌설을 믿는 사람은 무슬림이 테러행위를 저지르면 ‘이슬람의’ 테러리즘에만 주목한다”고 지적하며 “보스니아 내전 중 일어난 범죄 행위의 책임을 기독교에 돌려본 적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지도(地圖)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지도(指導)해 준다고 한다. ‘세계경제, 포스트식민주의와 신제국주의, 페미니즘과 인권, 세속주의와 이슬람’의 주제로 구성된 권력지형도를 통해 미처 모르고 있었던 세상을 당신의 지도에 그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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